연구 현장에서 데이터 수집이 끝나고 유의미한 결론이 나와 논문의 문장을 다듬는 순간은, 길었던 불확실성이 걷히며 한숨을 돌리는 안도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한국의 연구 환경에서 논문 작성은 종종 다른 의미의 피로로 다가옵니다. 반도체 등 일부 산업 중심 분야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연구가 국가 R&D 과제로 진행되는 현실에서, SCI 논문 편수라는 행정 편의주의적 잣대는 연구의 본질보다 '실적을 위한 글쓰기'를 앞세우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성형 AI의 등장은 이러한 낡은 학술 생태계의 문법을 밑바닥부터 뒤흔들고 있습니다. 이제 논문이라는 정형화된 글쓰기는 종말을 고하고, 과학을 수행하고 평가하는 방식 자체가 근본적으로 재편되는 분기점에 서 있습니다. 껍데기가 된 논문과 심사 권력의 지체 현상 ..
‘꿈의 4만 달러’ 문턱에서 마주한 차가운 질문 전 세계적으로 인구 5천만 명 이상의 국가 중 1인당 국민총소득(GNI) 4만 달러를 달성한 나라는 미국, 독일, 일본, 영국 등 소수의 전통 선진국에 불과했습니다. 전쟁의 폐허에서 출발해 압축 성장을 거듭해 온 한국인들에게 ‘국민소득 4만 달러’는 도달하기 어려운 오랜 숙원이자 꿈의 숫자로 여겨져 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한국 경제는 그 상징적인 고지를 마침내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거리에 나선 시민들의 입에서는 축하의 환호 대신 “소득은 늘었다는데 왜 내 삶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는가”라는 씁쓸한 반문이 터져 나옵니다. 올 3분기 실질 국내총소득(GDI)이 전년 대비 19% 가까이 폭증하며 지표상으로는 유례없는 호황을 가리키고 있지만, 대다수..
새벽 네 시의 한강 다리 난간은 손바닥이 얼어붙을 만큼 차가웠다. 남자는 그 난간을 쥐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리한 신용 대출과 영혼까지 끌어모았던 바이오 급등주가 거래정지 처분을 맞던 날, 그에게 남은 것은 마이너스 수억 원의 부채와 텅 빈 통장, 그리고 쫓아오는 독촉뿐이었다. 가족도, 내일도 사라진 자리에서 남은 길은 검은 물속으로 몸을 던지는 것뿐이라 믿었다. 차가운 강바람이 뺨을 때릴 때, 남자의 머릿속 한계선이 뚝 끊어졌다. 수년간 피를 말리며 들여다보던 호가창의 잔상과 수만 시간의 차트 파동이 주마등처럼 폭발하더니, 기이할 정도로 고요한 무감각이 찾아왔다. 돈을 벌고 싶다는 지독한 탐욕도, 죽고 싶다는 처절한 공포도 하얗게 증발해 버렸다. 남자는 완전히 비어버린 껍데기가 되어 난간에서 ..
기적의 유통기한이 끝난 자리: 부풀려진 기대와의 결별 지난 30여 년간 한국 사회의 자부심이었던 성취들이 하나둘씩 흔들리고 있습니다. 한국 경제의 버팀목이던 반도체 산업은 주가 하락과 함께 중국의 맹추격, AI 산업의 성숙화라는 거대한 파도를 맞고 있습니다. 특히 3D D램과 같은 새로운 반도체 제조 공정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은, 과거 초미세 공정 숙련도에 의존해 힘들여 구축해 놓은 한국의 생산 생태계를 후발 주자들이 우회할 수 있는 위기이기도 합니다. 다른 주력 산업들이 이미 성숙기에 들어서 잠잠한 상황에서 반도체의 흔들림은 곧 한국 경제의 성장 신화가 끝나는 듯한 위기감을 줍니다. 이러한 균열은 산업에만 국한되지 않고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사회 시스템 전반에서 동시에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의료 현장에..
경동시장 주식회사에서 찾는 지대 억제와 유인 일치의 경제학 경동시장은 서울 도심의 대표적 시장임에도 바가지 논란 없이 뛰어난 가격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연관 검색어가 '가성비'일 정도로 식자재와 물건값이 저렴한 이유는 상인들이 곧 주인이자 세입자인 '경동시장 주식회사' 시스템에 있습니다. 해방 이후 상인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시장 건물을 올리고 주식회사 소유로 만들면서, 입점 상인들은 주주이면서 동시에 세입자라는 이중적 지위를 갖게 되었습니다. 월세를 올리면 회사의 배당은 늘지만 자신이 낼 임대료도 함께 오르기 때문에,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기계적으로 임대료를 올릴 이유가 없습니다. 이러한 구조는 인근 다른 건물 상가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경동시장 주식회사 건물의 낮은 임대료에 맞추지 않으..
최근 이른바 ‘응급실 미수용 방지법’이 입법 수순을 밟고 있습니다. 구급대가 병원마다 일일이 전화를 돌려 환자 수용 여부를 묻던 기존 방식을 없애고, 지자체 시스템상 수용 능력이 있는 것으로 보이면 사전 문의 없이 구급대가 환자를 바로 이송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환자 수용 판단 권한을 구급대에 넘겨주는 대신, 의료진에게는 형사처벌 ‘감면’이라는 일종의 절충안을 제시하며 법안 처리를 강행하는 모습입니다. 이에 대해 대한응급의학의사회는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강한 반대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현장 의료진이 가장 심각하게 꼽은 현실적 문제는 응급실 이용자의 절반가량을 차지하는 '경증 환자'의 쏠림 현상입니다. 물론 이 회견이 중증 응급환자를 외면하겠다는 취지는 결코 아니었습니다. 이미 현행 의료법상..
보이지 않는 곳에서 치러온 가격: '교차보조'가 지탱한 압축성장 병원 대기실에 앉아 있는 환자들은 겉보기에 모두 평등해 보입니다. 같은 진료실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똑같이 친절한 의료진의 안내를 받습니다. 그러나 진료가 끝나고 수납창구에서 진료비를 알려주고 결제하는 모습에서 보이지 않는 차이가 드러납니다. 원가 이하로 묶인 건강보험 급여 치료만 받는 환자가 있고, 비급여 치료를 섞어 받는 환자가 있습니다. 병원 경영의 관점에서 보면, 비급여 치료를 받은 환자가 지불한 비용이 급여 환자의 적자를 메워주며 병원 문을 열어두고 있는 셈입니다. 식당도 마찬가지입니다. 손이 많이 가고 원자재 부담이 큰 안주를 저렴하게 내놓을 수 있는 이유는 애주가들이 마시는 소주와 맥주의 높은 마진 덕분입니다. 술을 마시지 ..
관리급여 전환과 1차 진료 모델의 한계 도수치료가 관리급여 체계 안으로 편입되자마자 처방량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습니다. 처방약 배송을 둘러싼 약사회의 반발은 여전히 거세고, 지역 의료망의 중증 응급 대응력은 이미 수치로 확인할 수 있을 만큼 약화되었습니다. 대학병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개원가 바닥에서도 지난 수십 년간 작동하던 단독 개원 문법이 멈춰 서고 있습니다. 최근 부쩍 늘어난 외국인 대상 병원 개원은 이러한 균열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입니다. 10여 년 전 처음 개원을 준비할 때, 명동에서 중국인과 일본인 환자를 보던 선배 원장님의 글이 기억납니다. 한마디로 수익 변동성이 극단적이었습니다. 어떤 달은 상상 이상의 매출을 찍었지만, 어떤 날은 진료실을 원장님 혼자 지키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당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