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유통기한이 끝난 자리: 부풀려진 기대와의 결별 지난 30여 년간 한국 사회의 자부심이었던 성취들이 하나둘씩 흔들리고 있습니다. 한국 경제의 버팀목이던 반도체 산업은 주가 하락과 함께 중국의 맹추격, AI 산업의 성숙화라는 거대한 파도를 맞고 있습니다. 특히 3D D램과 같은 새로운 반도체 제조 공정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은, 과거 초미세 공정 숙련도에 의존해 힘들여 구축해 놓은 한국의 생산 생태계를 후발 주자들이 우회할 수 있는 위기이기도 합니다. 다른 주력 산업들이 이미 성숙기에 들어서 잠잠한 상황에서 반도체의 흔들림은 곧 한국 경제의 성장 신화가 끝나는 듯한 위기감을 줍니다. 이러한 균열은 산업에만 국한되지 않고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사회 시스템 전반에서 동시에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의료 현장에..
경동시장 주식회사에서 찾는 지대 억제와 유인 일치의 경제학 경동시장은 서울 도심의 대표적 시장임에도 바가지 논란 없이 뛰어난 가격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연관 검색어가 '가성비'일 정도로 식자재와 물건값이 저렴한 이유는 상인들이 곧 주인이자 세입자인 '경동시장 주식회사' 시스템에 있습니다. 해방 이후 상인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시장 건물을 올리고 주식회사 소유로 만들면서, 입점 상인들은 주주이면서 동시에 세입자라는 이중적 지위를 갖게 되었습니다. 월세를 올리면 회사의 배당은 늘지만 자신이 낼 임대료도 함께 오르기 때문에,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기계적으로 임대료를 올릴 이유가 없습니다. 이러한 구조는 인근 다른 건물 상가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경동시장 주식회사 건물의 낮은 임대료에 맞추지 않으..
최근 이른바 ‘응급실 미수용 방지법’이 입법 수순을 밟고 있습니다. 구급대가 병원마다 일일이 전화를 돌려 환자 수용 여부를 묻던 기존 방식을 없애고, 지자체 시스템상 수용 능력이 있는 것으로 보이면 사전 문의 없이 구급대가 환자를 바로 이송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환자 수용 판단 권한을 구급대에 넘겨주는 대신, 의료진에게는 형사처벌 ‘감면’이라는 일종의 절충안을 제시하며 법안 처리를 강행하는 모습입니다. 이에 대해 대한응급의학의사회는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강한 반대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현장 의료진이 가장 심각하게 꼽은 현실적 문제는 응급실 이용자의 절반가량을 차지하는 '경증 환자'의 쏠림 현상입니다. 물론 이 회견이 중증 응급환자를 외면하겠다는 취지는 결코 아니었습니다. 이미 현행 의료법상..
보이지 않는 곳에서 치러온 가격: '교차보조'가 지탱한 압축성장 병원 대기실에 앉아 있는 환자들은 겉보기에 모두 평등해 보입니다. 같은 진료실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똑같이 친절한 의료진의 안내를 받습니다. 그러나 진료가 끝나고 수납창구에서 진료비를 알려주고 결제하는 모습에서 보이지 않는 차이가 드러납니다. 원가 이하로 묶인 건강보험 급여 치료만 받는 환자가 있고, 비급여 치료를 섞어 받는 환자가 있습니다. 병원 경영의 관점에서 보면, 비급여 치료를 받은 환자가 지불한 비용이 급여 환자의 적자를 메워주며 병원 문을 열어두고 있는 셈입니다. 식당도 마찬가지입니다. 손이 많이 가고 원자재 부담이 큰 안주를 저렴하게 내놓을 수 있는 이유는 애주가들이 마시는 소주와 맥주의 높은 마진 덕분입니다. 술을 마시지 ..
관리급여 전환과 1차 진료 모델의 한계 도수치료가 관리급여 체계 안으로 편입되자마자 처방량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습니다. 처방약 배송을 둘러싼 약사회의 반발은 여전히 거세고, 지역 의료망의 중증 응급 대응력은 이미 수치로 확인할 수 있을 만큼 약화되었습니다. 대학병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개원가 바닥에서도 지난 수십 년간 작동하던 단독 개원 문법이 멈춰 서고 있습니다. 최근 부쩍 늘어난 외국인 대상 병원 개원은 이러한 균열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입니다. 10여 년 전 처음 개원을 준비할 때, 명동에서 중국인과 일본인 환자를 보던 선배 원장님의 글이 기억납니다. 한마디로 수익 변동성이 극단적이었습니다. 어떤 달은 상상 이상의 매출을 찍었지만, 어떤 날은 진료실을 원장님 혼자 지키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당시..
20년 만에 돌아온 뜸과 전임상 연구를 바라보는 시선최근 한의원 대상 홍보물에서 거의 20여 년 만에 뜸을 전면에 내세운 치료 시스템이 다시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2000년대 초반 고깃집 환기 덕트를 달고 유행하던 왕뜸 열풍이 지나간 뒤, 뜸은 한동안 급여 진료의 일부로 조용히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세상은 돌고 돌며 하늘 아래 완전히 새로운 것은 드물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진한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수천 년의 임상 경험을 가진 유효한 치료 수단임에도 불구하고, “왜 뜸인가”에 대한 현대적 해석—특히 분자생물학의 관점에서 설명하려는 시도는 여전히 드물기 때문입니다. 임상 현장의 원장님들 입장에서는 분자생물학이나 전임상 동물실험을 통한 해석이 낯설거나 당장 필요 없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환자..
'연대(Solidarity)'라는 개념은 직관적으로 도덕적 우위를 점유하곤 합니다. 반면 그 대척점에 선 태도는 흔히 '각자도생'이나 '생존주의'라는 거친 프레임으로 환원되어 비판의 대상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회과학적 층위에서 이를 들여다보면, 이는 선악의 대립이 아니라 위험을 사회적으로 공동 풀링(Risk-pooling)할 것인가, 아니면 시장 규율과 개별 주체의 책임에 맡길 것인가에 관한 제도적 선택의 문제입니다. 1. 에이전시와 커뮤니언: 생존주의를 넘어선 자율적 적응성심리학자 데이비드 바칸(David Bakan)[1]은 인간 실존과 공동체를 지탱하는 근원적 양식으로 타자와의 연결을 추구하는 '커뮤니언(Communion)'과 개체의 자율적 분리와 통제를 지향하는 '에이전시(Agency)'를 제..
최근 금융 시장은 급작스런 미국채 금리의 상승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과거의 저금리 기조로 복귀하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급망 분절과 지정학적 갈등, 만성적 재정 적자를 고려하면 이번 국면은 단순한 경기 순환의 한 페이지가 아닙니다. 우리는 지난 30년간 누려온 장기적인 금리 인하 추세와 결별하고, 구조적 고금리가 일상화되는 장기 사이클의 초입에 서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러한 통화정책의 대전환은 단순한 물가 관리를 넘어 냉혹한 국제정치적 역학 관계 속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자본의 비용과 지정학적 의지 많은 전문가들이 고금리 장기화의 배경으로 탈세계화에 따른 생산 비용 상승, 기후변화 대응 비용, 그리고 인구 구조 변화 등을 꼽습니다. 틀린 분석은 아니지만, 통화의 역사를 보다 거시적인 시각에서 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