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 연구 평가인가 지역 발전 정책인가
2026년 상반기 기초연구 선정 결과가 발표되었습니다. 늘 그렇듯 연구재단은 금요일 오후, 전화 문의에 가장 적게 시달릴 시간에 결과를 공개했습니다. 매년 반복되는 일이지만 연구자들의 기대는 여전히 비슷합니다. “그래도 이만큼 연구했고, 최근 논문도 나갔고, 계획서도 신경 써서 썼으니 하나쯤은 되지 않을까.” 많은 연구팀이 이런 생각으로 결과를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올해 결과는 많은 연구자들에게 당혹감을 안겨주었습니다. 발표 하루 전 정부 보도자료에서도 이미 정책 방향의 단서가 보였습니다. 이번 기초연구 정책의 핵심이 연구 경쟁력 강화라기보다는 지역 균형 확대에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실제 데이터를 보면 이러한 정책 방향은 분명히 드러납니다. 수도권 과제 수는 전년 대비 13.6% 증가한 반면, 충청권 42.4%, 동남권 39.2%, 대경권 43.4%, 기타 권역 45.1% 등 지방 권역은 대부분 40% 내외의 증가율을 보였습니다. 그 결과 전체 기초연구 과제에서 수도권 비중은 2025년 58.5%에서 2026년 53.3%로 약 5%포인트 감소했습니다. 과제 총량은 증가했지만 연구비 배분 구조는 분명히 지역 균형 중심으로 재편되었습니다.
무너지는 연구 평가에 대한 신뢰
지방균형발전 자체를 반대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정책이 적용되는 영역입니다. 연구 정책은 단순한 지역 지원 정책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연구는 장비, 인력, 경험, 네트워크 등 다양한 요소가 축적될수록 효율이 높아지는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많은 교수들은 정부 기초연구 과제만큼은 비교적 명확한 원칙이 있다고 믿어왔습니다. 논문 성과를 내고 연구 방향을 정리하며 계획서를 준비하면 그에 따라 평가받을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논문을 쓰고 특허를 준비하며, 심지어 연구계획서의 형식과 문단 구조까지 세심하게 정리하면서 과제 신청을 준비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번 결과는 연구자들에게 다른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연구 역량과 성과뿐 아니라 지역이라는 요소가 상당한 비중으로 작용한다는 신호입니다. 만약 연구자들이 “열심히 연구하면 과제를 받을 수 있다”는 기본적인 신뢰를 잃게 된다면, 연구 생태계 전체의 동력 역시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침묵하는 과학계의 위험
또 다른 문제는 연구 수행 구조입니다. 연구 인프라가 충분히 축적되지 않은 지역 연구팀이 갑작스럽게 많은 과제를 맡게 되면 연구 설계, 장비 확보, 연구 인력 운영 등에서 부담이 커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연구에서 실험군과 대조군의 차이가 보이지 않는 결과의 실패가 아닌, 스스로 쓴 연구 계획서에 적힌 내용을 수행하지 못하는 과정의 실패가 일이 현실화 될 것입니다. 일부 연구는 외부 협력이나 사실상의 하청 구조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습니다.
최근 정부가 연구자의 3책 5공으로 대표되는 과제 참여 제한 규정을 완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도 이러한 현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공동연구라는 이름 아래 연구 수행 구조가 재편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번 정책을 통해 한 가지 분명해진 점도 있습니다. 정부가 기초연구를 반도체나 2차전지와 같은 국가 전략 산업과 동일한 수준의 경쟁력 정책으로 바라보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입니다. 만약 기초연구가 국가 과학 경쟁력의 핵심이라고 판단했다면, 연구 역량이 집중된 곳의 비중을 의도적으로 낮추는 정책은 쉽게 선택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묵묵히 연구를 계속할 것입니다. 과학계는 놀라울 정도로 조용합니다. 그러나 침묵은 언제나 안정의 신호가 아닙니다.
간질환이나 췌장암이 무서운 이유는 병이 상당히 진행될 때까지 외부에서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과학계 역시 마찬가지일지 모릅니다. 연구 현장의 피로와 불신이 조용히 축적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연구자들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기 어렵다고 느끼는 순간이 온다면, 그때는 이미 문제를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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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사입니다. 근데 그냥 침만 놓는 사람 아닙니다. 한의학부터 사회 꼬집기, 경제·경영 및 기술까지— 세상이 던지는 말들에 한 마디씩 반사해봅니다. 오신 모든 분들,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