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합의로서의 창의성
AI로 인한 삶의 변화는 현재 진행형입니다. 인간의 창의성, 감정, 전문직의 판단 영역까지도 기계가 대체할 수 있다는 주장이 더 이상 과장으로만 들리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저임금 육체노동이 먼저 대체될 것이라 예상했지만, 실제로는 고부가가치 영역이 빠르게 자동화되고 있습니다. 그 끝에 ‘창의성’이 있습니다.
창의성은 본질적인 속성이라기보다, 사회적으로 가치가 승인된 이후에 붙는 이름일지도 모릅니다. 창의성이 되기 전의 생각은 특이한 의견, 소수 주장, 혹은 위험한 발상으로 취급받기도 합니다. 결과적으로 인정받았을 때 비로소 우리는 그것을 창의적이라 부릅니다. 그렇기에 창의성은 절대적 개념이라기보다 사회적 합의의 산물에 가깝습니다.
지금의 AI는 이러한 승인 구조의 일부를 빠르게 통과합니다. 방대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새로운 조합을 만들어내고, 인간이 오랜 시간 숙고해야 했던 결과를 단시간에 도출합니다. 그것이 완전한 창의성인지에 대한 논쟁은 남아 있지만, 적어도 창의성의 상당 부분을 구성하는 ‘조합과 재구성’은 이미 수행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창의성이 인간만의 고유 영역이라는 전제를 다시 생각해보아야 하는 시점에 와 있습니다.
문해력 논란과 읽기의 변화
AI가 긴 글을 요약해주고 핵심만 정리해주는 시대가 되면서 문해력 저하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습니다. 긴 글을 끝까지 읽지 않아도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필요합니다. 문해력이란 과연 무엇입니까. 긴 글을 끝까지 읽는 능력일까요, 아니면 정보를 이해하고 연결하는 능력일까요.
글은 그 사회의 반영이며, 저자와 독자가 공유하는 세계 안에서 형성됩니다. 중세의 문체와 현대의 문체가 다른 것은 문해력 저하 때문이 아니라 시대적 맥락의 차이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짧은 글을 읽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훨씬 더 많은 양의 텍스트를 접합니다. 하나의 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대신, 여러 자료를 넘나들며 정보를 연결합니다.
비유하자면 과거에는 벽돌 같은 한 권의 책이 지식을 설명했다면, 지금은 얇은 소책자 수십 권을 오가며 읽는 방식입니다. AI는 그 과정에서 내가 궁금해하는 정보를 즉시 정리해주는 보조자와 같습니다. 답변 하나는 짧을지 몰라도, 이어지는 질문과 답변은 순식간에 한 권 분량의 대화를 만들어냅니다. 읽기의 형식은 변했지만, 사고와 연결의 과정이 반드시 축소되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존재론적 불안과 적응의 방향
AI에 대한 두려움은 단순히 직업을 잃을 수 있다는 경제적 우려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만이 할 수 있다고 믿어왔던 영역이 침범당하는 듯한 느낌, 다시 말해 존재의 의미 자체가 약해질 수 있다는 불안이 더 깊은 층위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나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일을 한다’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작가를 비롯해 과학자·프로그래머·의사·변호사뿐 아니라 화가·작곡가·교수처럼 오랫동안 인간 고유의 창의성과 판단, 통찰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직업들까지 대체 가능성의 대상으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이 AI 시대를 특징짓는 고유한 장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술은 언제나 인간의 정체성을 재정의해왔습니다. 인쇄술이 등장했을 때도, 사진기가 발명되었을 때도, 컴퓨터가 보급되었을 때도 비슷한 불안은 존재했습니다. 인간은 그때마다 역할을 바꾸고 새로운 가치를 찾아왔습니다. 어려웠던 일이 쉬워지면, 우리는 또 다른 어려움을 찾아 나섭니다. 우주 개척이나 질병 극복처럼, 과거에는 상상에 가까웠던 영역이 다음 목표가 됩니다.
중요한 것은 AI가 무엇을 빼앗는가가 아니라, 나의 삶을 어떻게 확장시킬 수 있는가를 묻는 일입니다. AI는 우리가 시간과 비용의 제약 때문에 시도하지 못했던 일들을 가능하게 할 잠재력이 있습니다. 그 가능성을 체감하는 순간, 두려움은 줄어들고 적응은 빨라질 것입니다. 변화는 막기 어렵지만, 방향을 선택하는 일은 여전히 우리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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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사입니다. 근데 그냥 침만 놓는 사람 아닙니다. 한의학부터 사회 꼬집기, 경제·경영 및 기술까지— 세상이 던지는 말들에 한 마디씩 반사해봅니다. 오신 모든 분들,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