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이른바 ‘응급실 미수용 방지법’이 입법 수순을 밟고 있습니다. 구급대가 병원마다 일일이 전화를 돌려 환자 수용 여부를 묻던 기존 방식을 없애고, 지자체 시스템상 수용 능력이 있는 것으로 보이면 사전 문의 없이 구급대가 환자를 바로 이송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환자 수용 판단 권한을 구급대에 넘겨주는 대신, 의료진에게는 형사처벌 ‘감면’이라는 일종의 절충안을 제시하며 법안 처리를 강행하는 모습입니다. 이에 대해 대한응급의학의사회는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강한 반대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현장 의료진이 가장 심각하게 꼽은 현실적 문제는 응급실 이용자의 절반가량을 차지하는 '경증 환자'의 쏠림 현상입니다. 물론 이 회견이 중증 응급환자를 외면하겠다는 취지는 결코 아니었습니다. 이미 현행 의료법상..
'연대(Solidarity)'라는 개념은 직관적으로 도덕적 우위를 점유하곤 합니다. 반면 그 대척점에 선 태도는 흔히 '각자도생'이나 '생존주의'라는 거친 프레임으로 환원되어 비판의 대상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회과학적 층위에서 이를 들여다보면, 이는 선악의 대립이 아니라 위험을 사회적으로 공동 풀링(Risk-pooling)할 것인가, 아니면 시장 규율과 개별 주체의 책임에 맡길 것인가에 관한 제도적 선택의 문제입니다. 1. 에이전시와 커뮤니언: 생존주의를 넘어선 자율적 적응성심리학자 데이비드 바칸(David Bakan)[1]은 인간 실존과 공동체를 지탱하는 근원적 양식으로 타자와의 연결을 추구하는 '커뮤니언(Communion)'과 개체의 자율적 분리와 통제를 지향하는 '에이전시(Agency)'를 제..
최근 금융 시장은 급작스런 미국채 금리의 상승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과거의 저금리 기조로 복귀하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급망 분절과 지정학적 갈등, 만성적 재정 적자를 고려하면 이번 국면은 단순한 경기 순환의 한 페이지가 아닙니다. 우리는 지난 30년간 누려온 장기적인 금리 인하 추세와 결별하고, 구조적 고금리가 일상화되는 장기 사이클의 초입에 서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러한 통화정책의 대전환은 단순한 물가 관리를 넘어 냉혹한 국제정치적 역학 관계 속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자본의 비용과 지정학적 의지 많은 전문가들이 고금리 장기화의 배경으로 탈세계화에 따른 생산 비용 상승, 기후변화 대응 비용, 그리고 인구 구조 변화 등을 꼽습니다. 틀린 분석은 아니지만, 통화의 역사를 보다 거시적인 시각에서 살..
의대 정원 확대 논의가 지역의사제 도입으로 구체화되면서, 매년 수백 명 규모의 의사 인력을 10년간 지역에 의무 복무시키는 구조가 점차 가시화되고 있습니다. 의사를 특정 지역에 묶어두는 공급 통제가 현실화된다면, 뒤따라올 정책적 질문은 자명합니다. 과연 '수요'인 환자는 수도권으로 자유롭게 떠나도록 계속 열어둘 수 있을까요? 공급을 통제했으니 수요도 통제해야 한다는 이른바 '지역환자제' 논의가 단순한 반발 심리를 넘어 실제 정책 카드로 검토될 가능성을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90년대 진료권 체계의 기억과 수도권 쏠림의 비용 지역환자제는 완전히 새로운 개념이 아닙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의료보호 및 건강보험 제도 안에서 거주 지역에 따라 3차 병원 이용이 엄격히 제한되었습니다. 당시 환자들은 중증 ..
헤게모니의 이동과 예견된 수순: '의료사고 이력 공개'의 본질 최근 의료사고 이력 공개를 둘러싼 논란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습니다. 환자와 국민 다수는 찬성하고 의사 단체는 반대하는 전형적인 구도처럼 보이지만, 과거와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지난 의정 사태 이후 의료 정책의 헤게모니가 정부와 국회로 완전히 넘어갔다는 점입니다. 이제는 의사협회의 반발보다 국가의 정책 추진 의지가 훨씬 더 중요한 변수가 되었습니다. 의료사고 이력 공개는 개념적으로 단순하며 국민적 수용성이 높아 시행 자체는 명약관화한 수순입니다. 유일한 걸림돌은 현재 급격히 가속화되는 지방 및 필수의료 소멸에 기름을 붓는 모양새가 될까 하는 정부의 우려뿐입니다. 중증 환자를 많이 담당할수록 의료사고 리스크도 높아질 수밖에 없는데, 헌신..
한의사로서 의료일원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에는 저마다 다양한 시선이 존재할 것입니다. 협회 회무를 수행하며 의료일원화 논의가 치열하게 오가던 현장을 직접 경험했고, 그 이후로도 주위의 한의사, 의사, 그리고 복수면허자 분들로부터 여러 이야기와 고민을 들으며 다각도로 생각해보았습니다. 각 직역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 당사자 간의 합의 도출은 늘 난제였고, 정부와 국회 역시 신중하게 접근하려 했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동안 지진부진했던 의료일원화 논의는 어쩌면 직역 간의 타협이 아닌, 더 큰 사회구조적 변화에 따라 강제될 가능성이 큽니다. 지난 20년간 공고했던 의사협회의 정책적 우위가 흔들린 후 단 1~2년 만에 일어난 격변은 이전 20년의 변화보다 훨씬 거대했습니다. 의료일원화 역시 이러한 사회·경제적 ..
잃어버린 주도권과 한국형 의료의 비극적 착근의정사태 이후 한동안 한국 의료의 변화에 대한 글을 쓰고, 또 깊이 고민해 보았습니다. 대부분의 생각은 이미 글 속에 녹아 있거나 비슷한 생각의 반복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고민을 놓지 못했던 이유는 과연 이 사태의 끝이 어떤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날지 명확히 그려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필수의료만 보장하는 공공의료로의 재편, 비급여 클리닉과의 양극화, 의료사고 면책 여부와 의료 이용량의 축소 등 다양한 사안들이 논의되지만, 가슴에 와닿는 명쾌한 결말은 없었습니다.단순히 영국식의 무한 대기 체계나, 미국식의 민간 사보험 체계로의 전환은 현재 한국의 상황에 맞지 않습니다. 특히 '당연지정제'는 정부가 전복되기 전까지는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국가가 막대한 비용을 들이지..
최근 대한민국 의료계를 흔들고 있는 필수의료 공백과 실손보험 축소 등 의료 정책의 변화를 보고 있으면 기묘한 기시감이 듭니다. 이는 우리가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아닙니다. 이미 선진국들이 수십 년 전, 의료를 강하게 억압하고 통제하려다 피를 흘리며 지나온 ‘오래된 미래’에 가깝습니다. 그중에서도 2000년대 중반 이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영국 국민보건서비스(NHS)의 치과 인프라 붕괴 사태는, 급여와 비급여 시장이 위태롭게 공존하는 대한민국 동네 병원의 미래를 가장 날것 그대로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착한 가격의 덫과 UDA 사태: 공급자를 적대시한 규제가 부른 파국 2006년, 영국 정부는 치과의사들이 과도한 수입을 올린다는 여론의 비판에 직면하자 칼을 빼 들었습니다. 과잉 진료를 막..
병원 개원을 고민하시는 선생님들이 부쩍 많아진 요즘입니다. 저마다의 이유는 다양할 것입니다. 이미 기존의 병원 수익 구조가 무너지고 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봉직의로서 마주하는 한계에 답답했을 수도 있고, 한편으로는 그래도 개원을 하면 큰돈을 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마음 한구석에 있을 것입니다.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후배 원장님들의 숫자를 보며 '한시라도 늦으면 더 불리해지는 게 아닐까' 하는 조급함도 밀려오겠지요. 문득 제가 한의원 개원을 준비했던 2015년도가 떠오릅니다. 당시에도 주위에서 개원을 말리는 사람이 정말 많았습니다. 지금처럼 추나와 첩약이 보험 영역에 들어있지 않던 시절이라 실손 보장은 꿈도 꾸기 어려웠고, 비급여의 핵심인 한약 처방 건수마저 정체되어 있어 참 암울해 보였..
2026년 7월부터 도수치료가 관리급여로 편입됩니다. 많은 언론은 이를 "환자 부담을 낮추는 정책"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 정책의 영향은 단순히 도수치료 가격이 얼마가 되느냐에 그치지 않습니다. 실손보험과 비급여에 의존해 유지되던 1차 의료기관의 수익구조, 그리고 그 안에서 일하던 물리치료사들의 고용시장까지 연쇄적으로 흔들 수 있는 변화입니다. 실손보험 개혁의 본질은 의료 공급구조의 재편이다 우리나라 건강보험 제도는 오랫동안 낮은 수가를 기반으로 운영되어 왔습니다. 환자 입장에서는 저렴한 의료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었지만, 의료기관 입장에서는 건강보험 진료만으로 충분한 수익을 확보하기 어려운 구조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비급여 진료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특히 검사, 도수치료, 체외충격파 치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