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글에서 저는 한국이 강대국과 선진국의 갈림길에서 고민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국가의 방향성이 부재한 상태에서 자원의 배분만 변화하는 사회는 안정적일 수는 있어도 역동적인 사회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동안 선진국이 되자는 국가적 목표에 그 어느 누구보다도 한국인들은 충실하게 따라갔고, 마침내 이루었습니다. 이제는 그 다음을 생각할 때가 되었습니다. 하드파워를 넘어선 '질서 설계자'로서의 소프트파워 강대국이 되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하드파워가 필요합니다. 제가 앞선 글에서 강조했듯 생산성이 세계의 공장으로서 기능할 만큼 높아야 하며, 에너지 자립 역시 필수적입니다. 또한 강대국은 외부에 자신의 의지를 투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지금처럼 모든 국가와 잘 지내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분쟁을 각오하..
최근 우리 사회 곳곳에서는 한국이 발전의 정점을 지나 쇠퇴의 징후를 보이고 있다는 우려 섞인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한국전쟁이나 IMF 외환위기 같은 극단적인 고통의 시기는 아닐지라도, 우리가 지금보다 더 강력하고 번창하는 국가가 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에 많은 이가 동의하고 있습니다.현재 대한민국은 역사상 유례없는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이라는 하드파워, 그리고 K-Pop으로 대표되는 소프트파워를 동시에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구 구조의 붕괴를 목격하며 정체 모를 두려움에 휩싸여 있습니다. 세계 어느 국가보다 빠른 성장을 일궈냈음에도 우리를 덮고 있는 이 어색하고도 실질적인 불안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선진국의 달성과 강대국의 신기루 사이에서 이러한 불안의 기저에는 우리가 '선진국'과 '강..
감정적 정책의 청구서: 의정 갈등이 보여주는 경제적 대가 국가 정책의 최종 결정권자는 결국 국민입니다. 굳이 헌법 1조 2항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대리인인 정치인의 손을 빌리든 국민이 직접 나서든, 정책의 추진과 그에 따른 책임은 오롯이 국민의 몫입니다. 언론을 통해 매일 쏟아지는 새로운 정책들은 막무가내인 듯싶다가도 여론의 눈치를 살피는 모양새를 취합니다. 문제는 이 복잡한 정책들을 국민이 매번 정확히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입니다. 최근의 의정 갈등만 봐도 그렇습니다. 여기에는 감정적인 대립과 복잡다단한 의료 시스템, 그리고 정치적 계산이 뒤엉켜 있습니다. 국민들은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의사들의 파업을 견디며 응급실 이용을 줄여야 했습니다. 지금은 개원가의 보장 축소가 화두입니다. "돈 잘 버는 의..
1. 멈추지 않는 폭격, 되돌릴 수 없는 의료의 변화 의정 갈등이 공식적으로 끝났나 싶으면서도, 최근 대한의사협회(이하 의협)와 정부의 갈등 양상을 보면 그야말로 점입가경입니다. 정부는 민감한 안건들을 융단 폭격하듯이 쏟아내고 있으며, 비대면 진료 등 지난 20여 년간 끌어왔던 쟁점 법안들은 통과를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지난 갈등 국면에서 총력 투쟁을 하지 못한 대가를 의협은 혹독하게 치르고 있는 셈입니다. 일각에서는 정부와 의협의 대화가 조금 더 원활했다면 파국은 피했을 것이라 말합니다. 하지만 지난 20년의 세월 동안 소통이 불가능했던 결과가 지금의 사태임을 감안하면, 과연 정답이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전공의 파업과 의대생 휴학이라는 가장 강력한 투쟁 카드를 소진해 버린 현시점에서, 정부와..
수명 연장의 이면, 달라진 질병의 양상 의료 체계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특성에 종속됩니다. 누구나 발전된 의료 기술을 원하지만, 싸고 좋은 기술은 쉽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실 인류의 건강 수준과 평균 수명을 비약적으로 늘린 1등 공신은 ‘신약’이나 ‘수술법’보다는 상하수도와 같은 위생 시설, 노동 환경의 개선, 사회 보장 제도 등 사람이 살아가는 제반 환경의 발전이었습니다. 과거에는 감염병이나 급성기 질환이 생사를 갈랐기에 위생과 방역이 수명 연장의 핵심이었습니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다릅니다. 이제는 만성질환과 노화로 인한 기능 저하를 안고 살아가는 기간이 길어졌습니다. 즉, ‘죽고 사는 문제’에서 ‘어떻게 앓으면서 살아갈 것인가’의 문제로 패러다임이 바뀐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
의사과학자(Physician-Scientist, MD-PhD)는 임상 현장의 질문을 실험실로 가져오고, 기초과학의 성과를 다시 환자에게 적용하는 '중개연구(Translational Research)'의 핵심입니다. 초고령화 사회 진입과 바이오헬스 산업의 중요성이 커지는 지금, 이들의 역할은 국가 경쟁력과 직결됩니다. 그러나 한국의 의사과학자 양성 정책은 실질적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지원 부족이 아닌, 정책을 주도하는 보건복지부의 '관점 오류'와 '구조적 자기모순'이라는 근본적인 한계 때문입니다. 혁신을 가속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정책 프레임을 '보건의료 통제'에서 '미래산업 육성'으로 완전히 전환해야 합니다. 혁신 촉진과 재정 통제의 자기모순 (보건복지부의 태생적 한계) 현재 의사과..
의정갈등은 공식적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1년 8개월간의 '보건의료 위기 경보 심각 단계'가 해제되고, 정부는 비상 진료 체계를 거두며 '정상화'를 선언했습니다. 의대 정원은 1,500여 명 늘었다가 동결되었고, 떠났던 전공의들은 각자의 선택에 따라 일부 복귀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간 듯 보입니다. 하지만 이는 폭풍 전의 고요함일 뿐입니다. 비대면 진료, 성분명 처방, 한의사 엑스레이 사용, 공단 특사경 등, 과거 의사협회(이하 의협)가 파업이라는 막강한 카드로 국회 상임위 안건 상정조차 막아왔던 정책들이 이제 정부의 숙원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제도화를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전공의 파업이라는 '핵폭탄'을 썼음에도 정부가 의료전달체계 개편과 PA 간호사 합법화로 시스템을 우회하자, 의..
1. 정부의 '설계': 왜 동네병원에서 검사가 사라지는가 1년 반 전 동네의원이 사라질 것을 예측한 글을 썼습니다. 그간 의정갈등이라는 큰일을 겪었지만, 정부의 기본 기조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의료전달체계 개편, 비대면진료 제도화 등 그 방향이 더 명확해졌습니다. https://jcleelab.com/118 동네의원이 절반 이상 사라진다면?정부가 발표한 필수의료 정책 패키지에 대한 반응이 뜨겁습니다. 의사협회와 환자 모두 만족하지 못하는 내용들이 있으며, 가장 쟁점인 의대정원 문제는 증원 원칙만 확인하고 구체적인 숫자는jcleelab.com 정부의 목표는 고령화로 인한 의료비 증가를 막고 '중증, 요양, 간병' 중심으로 의료체계를 재편하는 것입니다. 재원은 한정적이기에, 동네병원의 재원을 빼서 이..
1. 신약 대신 영양제를 파는 제약사들 한국에서 세계적인 수준의 신약이 나오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차세대 먹거리로 지난 10여년간 신약 개발을 포함한 바이오 산업은 빠진 적이 없었고 바이오 시밀러 등 일부 분야에서는 대기업의 과감한 투자 등으로 가시적인 성과를 내고 있습니다. 마운자로, 위고비 등 한 나라의 총 생산량을 좌우할 수준의 약들은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듣고 경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국이 그 동안 후진국에서 선진국 수준으로 따라잡은 산업이 한두개가 아님에도 유독 제약산업은 이런저런 이유를 대면서 지지부진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제약산업의 파급력을 모르는 바는 아닐텐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지 궁금한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이렇게 신약 개발의 매력이 떨어지는 구조 속에..
1. 모순의 시작: 20년 넘게 멈춘 '15,000원'의 굴레 노인외래정액제(이하 노인정액제)는 한의원을 운영하는 원장들에게는 익숙하지만, 대다수 사람에게는 생소한 개념입니다. 흔히 '어르신들은 2,000원이면 침 맞을 수 있다'는 것이 이 노인정액제를 적용받은 것으로, 신문 기사를 포함한 언론에서는 잘 모르기도 하고 별 관심도 없는 분야로 취급되어 왔습니다. 노인정액제는 1995년부터 노인들의 의료비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서 시작된 제도입니다. 입원이 아닌 외래 진료비 중 총 진료비가 15,000원 이하일 경우, 환자는 공단 청구 금액의 10% 수준인 1,500원(의원급 기준)만 본인부담금으로 내는 제도입니다. 이 제도가 복지 개념인 이유는, 노인이 아닌 일반 환자들은 청구하는 진료비의 30%를 환자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