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만에 연구 현장으로 돌아오니 많은 것이 변했음을 실감합니다. 과거에는 정부출연연구기관에서 임상 연구에 매진했다면, 지금은 대학 연구실에서 기초 연구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환경과 주제가 모두 바뀌어 일률적인 비교는 어렵지만, 연구는 여전히 '사람'이 하는 것이고, 수많은 동료가 각자의 자리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그 변화의 물결 속에서 저는 "왜 연구를 하고 학위를 취득해야 하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추격에서 선점으로, 양에서 질로의 패러다임 전환 지난 10년 사이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연구의 방향성입니다. 과거에는 소위 '선진국'이라 불리는 국가들의 뒤를 쫓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영국은 체계적 문헌 고찰, 미국과 유럽은 기초 연구,..
임상 의학의 '근거 중심' 흐름과 기초 연구의 암묵적 위계 지난 20년간 현대 의학은 '의사의 숙련도'라는 주관적 영역을 넘어, 근거중심의학(Evidence-Based Medicine, EBM)이라는 견고한 객관적 체계를 구축해 왔습니다. 과거 특정 병원에 가면 무조건 수술을 권유받던 시대와 달리, 이제는 진단 기기의 발달과 건강보험 시스템의 고도화로 인해 '입증된 치료'만이 사회적·경제적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특히 한국에서 나타난 의료비 효율화 시도는 '심평의학'이라는 자조 섞인 용어를 낳을 만큼 강력한 표준화의 흐름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명시적 근거 수준(Level of Evidence)은 임상 연구에만 국한되어 있을 뿐, 기초 연구 분야에서는 여전히 연구자들 사이의 '암묵적인 동의' 수..
🧐 1. 이 논문을 선택한 이유 (In Silico: '부작용'을 거르는 정밀 필터)마약성 진통제(Opioid)는 강력하지만 중독과 호흡 억제라는 치명적인 부작용이 있습니다. 기존 연구가 마약 수용체(MOR) 자체를 조절하는 물질을 찾으려 했다면, 이 논문은 "마약이 뇌 회로에 유도하는 '진통 상태(Analgesic State)'의 유전자 지도만 쏙 빼올 수 없을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특히 In silico를 통해 특정 수용체가 아닌 '회로 전사체 시그니처'를 타겟팅함으로써, 마약과 같은 효과를 내면서도 마약 수용체는 건드리지 않는(Non-opioid) 혁신적인 경로를 찾아냈습니다. 📝 2. 논문 정보논문 제목: Mimicking opioid analgesia in cortical pain..
지난 글을 통해 저는 의사과학자 양성 정책의 성공을 위한 전제 조건으로 주무 부처를 보건복지부에서 과학기술정보통신부로 이관해야 한다고 제안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현장에서 직접 몸담으며 깨달은 사실은, 부처 이관이라는 행정적 절차보다 훨씬 더 깊고 본질적인 ‘철학의 부재’가 대한민국 의사과학자 정책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점입니다. 정부는 연일 ‘바이오 헬스케어의 미래’를 외치고 있지만, 정작 현장의 연구자들은 정책의 모순 속에서 깊은 무력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행정 편의주의가 초래한 ‘사후 환수’의 공포 현재 많은 대학에서 이공계 대학원생들을 대상으로 ‘연구생활장려금’ 사업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전일제 대학원생들의 최소 생계비를 보조하겠다는 훌륭한 취지에도 불구하고, 실제 현장의 행정은 실망스럽기 그지없..
최근 글에서 저는 한국이 강대국과 선진국의 갈림길에서 고민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국가의 방향성이 부재한 상태에서 자원의 배분만 변화하는 사회는 안정적일 수는 있어도 역동적인 사회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동안 선진국이 되자는 국가적 목표에 그 어느 누구보다도 한국인들은 충실하게 따라갔고, 마침내 이루었습니다. 이제는 그 다음을 생각할 때가 되었습니다. 하드파워를 넘어선 '질서 설계자'로서의 소프트파워 강대국이 되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하드파워가 필요합니다. 제가 앞선 글에서 강조했듯 생산성이 세계의 공장으로서 기능할 만큼 높아야 하며, 에너지 자립 역시 필수적입니다. 또한 강대국은 외부에 자신의 의지를 투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지금처럼 모든 국가와 잘 지내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분쟁을 각오하..
🧐 1. 이 논문을 선택한 이유 (In Silico: '빈 잠금장치'를 만드는 설계도)우리는 보통 '잠금장치(Binding Site)'가 명확할 때 그에 맞는 '열쇠(약물)'를 찾기 위해 In silico를 씁니다. 하지만 Frizzled(FZD) 수용체는 그동안 소분자 화합물이 붙을 수 있는 주머니 자체가 어디인지조차 모르는 '난공불락'의 타겟이었습니다.이 논문은 "주머니가 없다면, 친척 모델(Smoothened)을 빌려와서 주머니를 먼저 설계하자"는 파격적인 In silico 전략을 보여줍니다. '데이터가 없어서 연구를 못 한다'는 핑계를 데이터 사이언스로 어떻게 극복하는지 보여주는 교과서적인 사례입니다. 📝 2. 논문 정보논문 제목: In silico docking yields small mol..
🧐 1. 이 논문을 선택한 이유 (In Silico: '상태'를 찾는 나침반)우리는 대개 '어떤 단백질 타겟에 어떤 약이 붙을까?'를 고민할 때 In silico를 사용합니다. 하지만 이 논문은 한 차원 더 나아갑니다. "성공적으로 재생되는 신경세포의 '상태(State)' 자체를 복제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척수 손상(SCI) 치료의 난제를 풀기 위해, 연구진은 '특정 타겟'이 아닌 '전사체 시그니처(Transcriptional Signature)'라는 거대한 데이터의 파도를 In silico로 분석했습니다. 복잡한 생물학적 현상을 데이터 사이언스로 단순화하여 실제 치료제(Thiorphan)까지 연결해낸 이 논문의 논리 구조는 네트워크 약리학을 공부하는 우리에게 큰 영감을 줍니다. 📝..
최근 우리 사회 곳곳에서는 한국이 발전의 정점을 지나 쇠퇴의 징후를 보이고 있다는 우려 섞인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한국전쟁이나 IMF 외환위기 같은 극단적인 고통의 시기는 아닐지라도, 우리가 지금보다 더 강력하고 번창하는 국가가 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에 많은 이가 동의하고 있습니다.현재 대한민국은 역사상 유례없는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이라는 하드파워, 그리고 K-Pop으로 대표되는 소프트파워를 동시에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구 구조의 붕괴를 목격하며 정체 모를 두려움에 휩싸여 있습니다. 세계 어느 국가보다 빠른 성장을 일궈냈음에도 우리를 덮고 있는 이 어색하고도 실질적인 불안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선진국의 달성과 강대국의 신기루 사이에서 이러한 불안의 기저에는 우리가 '선진국'과 '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