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을 통해 저는 의사과학자 양성 정책의 성공을 위한 전제 조건으로 주무 부처를 보건복지부에서 과학기술정보통신부로 이관해야 한다고 제안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현장에서 직접 몸담으며 깨달은 사실은, 부처 이관이라는 행정적 절차보다 훨씬 더 깊고 본질적인 ‘철학의 부재’가 대한민국 의사과학자 정책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점입니다. 정부는 연일 ‘바이오 헬스케어의 미래’를 외치고 있지만, 정작 현장의 연구자들은 정책의 모순 속에서 깊은 무력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행정 편의주의가 초래한 ‘사후 환수’의 공포
현재 많은 대학에서 이공계 대학원생들을 대상으로 ‘연구생활장려금’ 사업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전일제 대학원생들의 최소 생계비를 보조하겠다는 훌륭한 취지에도 불구하고, 실제 현장의 행정은 실망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자격 요건을 사전에 정밀하게 검토한 뒤 지급하는 체계가 아니라, 우선 집행한 후 사후에 서류상 결함이 발견되면 환수 조치를 단행하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국가 과제를 수행하는 연구자를 신뢰의 파트너가 아닌 감시와 통제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이러한 주먹구구식 행정은 연구자의 사기를 꺾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기회비용’을 부정하는 형평성의 역설
가장 뼈아픈 지점은 의약계열 기초 연구자에 대한 역차별입니다. 의사, 한의사, 치과의사, 수의사 등 면허 보유자들은 종종 이 장려금 지급 대상에서 배제되곤 합니다. “면허가 있으니 언제든 고소득을 올릴 수 있지 않느냐”는 행정 편의적인 가정이 그 근거입니다.
보건복지부의 ‘보건의료인력 실태조사’(2022년 발표, 2024년 업데이트 기준)에 따르면, 국내 전문의의 연평균 소득은 약 2억 8,500만 원에 달합니다. 반면, 기초의학 연구를 선택한 대학원생은 그 10분의 1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입으로 실험실에서 밤낮을 지새웁니다. 혹자는 나중에 임상으로 돌아가 소득을 보전하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기초의학에 매진하는 동안 임상 감각은 필연적으로 약화되며, 추후 개원가에 진출한다 하더라도 현장에서 수만 명의 환자를 마주하며 숙련도를 쌓은 동료들과의 격차를 극복하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이들이 낮 시간에 파이펫을 잡고 컴퓨터와 씨름하는 시간은 임상 의사로서 누릴 수 있는 막대한 경제적 보상과 경험적 자산을 기꺼이 포기한 시간입니다. 정책이 이들의 ‘기회비용’을 보전해주지는 못할망정, 단지 면허가 있다는 이유로 최소한의 안전망마저 박탈하는 것은 국가가 연구자들에게 “당장 연구를 접고 병원으로 돌아가라”고 등을 떠미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하향 평준화’가 정답입니까?
일각에서는 “임상 의사의 소득이 너무 높으니 이를 최저임금 수준으로 낮추면 자연스럽게 인재들이 연구 현장으로 유입되지 않겠느냐”는 극단적인 주장을 펼치기도 합니다. 최근 정부가 건강보험 제도를 사수하기 위해 의료계를 압박하는 흐름을 보면 언젠가 현실화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이는 인재 유치의 기본 원리를 망각한 대단히 위험한 발상입니다.
- 해외 유출의 가속화: 보상을 깎아 형평성을 맞추려 한다면, 우수한 인재들은 국내 연구실이 아닌 해외 연구소나 글로벌 제약사로 떠날 것입니다. 의사를 공무원처럼 대우하는 영국의 경우, 의대 졸업생 상당수가 해외로 이탈하거나 민간 기업으로 발길을 돌리고 있습니다. 영국은 그나마 글로벌 제약사라는 대안이라도 존재하지만, 한국은 곧장 국가적 인재 유출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 면허 수당의 폐지 사례: 과거 정부 기관과 대학 및 연구소에 존재했던 ‘면허 수당’이 조직 내 형평성 논란으로 사라진 이후, 많은 의료계열 연구기관은 우수 인력이 잠시 거쳐 가는 정거장으로 전락했습니다.
보상을 하향 평준화하여 갈등을 일시적으로 봉합하는 방식은 결국 ‘인재의 하향 평준화’라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할 뿐입니다.
국가의 정직한 선택을 촉구합니다
정부는 이제 선택해야 합니다. 모든 국민을 만족시키는 정책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특히 국가 경쟁력이 걸린 전략 사업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비난을 감수하고서라도 우수 인재에게 파격적인 보상을 제시하며 ‘국가 전략’으로 밀어붙일 것인지, 아니면 형평성이라는 가치를 절대 수호하며 특수한 지원 정책 자체를 폐기할 것인지 결단하십시오.
지금처럼 ‘육성’을 표방하면서 실질적인 ‘차별’을 행하는 기만적인 태도는 대한민국 의사과학자의 씨를 말리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사회는 다음의 두 갈래 길 중 하나를 선언해야 합니다.
“대한민국에 의사과학자는 없다. 오직 과학자만 있을 뿐이다. 고귀한 연구 현장에서 기회비용 같은 세속적인 금전 보상은 꿈도 꾸지 마라.”
혹은,
“국가의 미래 먹거리인 바이오 헬스케어 산업의 도약을 위해, 비록 특혜라는 비판이 따를지라도 파격적인 보상 체계를 동원하여 의사과학자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겠다.”
이도 저도 아닌 미온적인 태도로는 결코 미래를 열 수 없습니다. 정부의 선명한 지향점과 결단이 절실한 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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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사입니다. 근데 그냥 침만 놓는 사람 아닙니다. 한의학부터 사회 꼬집기, 경제·경영 및 기술까지— 세상이 던지는 말들에 한 마디씩 반사해봅니다. 오신 모든 분들,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