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약 대신 영양제를 파는 제약사들
한국에서 세계적인 수준의 신약이 나오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차세대 먹거리로 지난 10여년간 신약 개발을 포함한 바이오 산업은 빠진 적이 없었고 바이오 시밀러 등 일부 분야에서는 대기업의 과감한 투자 등으로 가시적인 성과를 내고 있습니다. 마운자로, 위고비 등 한 나라의 총 생산량을 좌우할 수준의 약들은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듣고 경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국이 그 동안 후진국에서 선진국 수준으로 따라잡은 산업이 한두개가 아님에도 유독 제약산업은 이런저런 이유를 대면서 지지부진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제약산업의 파급력을 모르는 바는 아닐텐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지 궁금한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이렇게 신약 개발의 매력이 떨어지는 구조 속에서, R&D에 쓰여야 할 자본과 역량은 고위험 혁신 신약이 아닌 저위험 현금 확보가 가능한 곳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신약을 개발해야 할 제약회사들은 본업인 R&D 대신 건강기능식품이나 드링크제, 심지어 생수 판매로 매출을 확보하는 본말이 전도된 현실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2. '급여'와 '비급여' 모두 막는 이중 봉쇄
기술, 역사 등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저는 정부의 신약 정책이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아는 것처럼 신약은 모래사장에서 바늘찾기 또는 그보다 낮은 성공확률을 가지고 있습니다. 수 많은 성분들 중 동물 실험을 포함한 기초 연구에서 탁월한 효능을 보여주는 것만이 임상시험에 들어갑니다. 임상시험은 진행될 수록 천문학적인 비용을 필요로 하며, 그럼에도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임상시험에 성공해서 시판허가를 받게 되면 남은 특허 기간동안 독점적 지위를 누리면서 투자 비용을 회수합니다. 제약도 주요 산업 중 하나지만 주식이나 코인 같은 투자 못지 않은 확률 게임을 하는 것입니다. 극단적으로 백번 중 99번 실패하고 1번만 성공해도 대단한 것이 신약 개발이기에, 성공한 신약은 특허기간동안 당연히 고가로 판매될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의 문제는 여기서 발생합니다. 정부가 신약의 가치를 인정하고 투자 비용을 회수할 시장 자체를 극도로 통제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한정된 국민건강보험 재정으로 모든 고가 신약을 감당할 수는 없습니다. 약가를 안정시켜야 하는 정부의 역할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 통제가 건보 재정을 아끼는 '급여' 영역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정부는 '급여 등재'의 문턱을 매우 높게 설정해 신약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기존 가장 비싼 약과 평균가격의 중간쯤을 선심 쓰듯 제시), 환자가 자신의 돈으로 약을 쓰겠다는 '비급여'라는 최소한의 시장 접근조차 사실상 봉쇄합니다. '선별급여'니 '임의비급여 금지'니 여러 이름이 붙지만, 결과적으로 **'보험으로 극히 싸게 팔거나' 아니면 '국내 시장에서 아예 팔지 말거나'**의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것입니다.
약을 싸게 먹으면 좋지 않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당연히 좋습니다. 그러나 부작용 또한 작지 않습니다. 난치병 신약이 개발되었는데, 이런 식의 약가 통제로 팔아도 투자금을 회수 못하는 구조면 해외 제약사뿐만 아니라 국내 제약사들조차 국내 출시를 포기합니다. 이것이 많은 국내 제약사가 아예 처음부터 내수 시장을 포기하고 해외 시장을 목표로 신약 개발을 진행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비싼 약이라 사지 못하는 것도 슬픈 일이지만, 돈이 있어도 정식 출시가 안 되니 해외에서는 치료가 되는 질병이 한국에서는 여전히 난치병으로 남아 특허가 풀려 복제약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3. 위선적 '제로썸' 게임: R&D 예산과 약가 통제의 모순
제가 '위선적'이라고 비판하는 지점은, 이처럼 신약 개발의 동기를 근본적으로 꺾는 구조를 알면서도 보건복지부가 한편으로는 '신약 개발 촉진'이라는 명목으로 막대한 R&D 예산을 받아 간다는 점입니다.
이는 명백한 정책적 모순이자 '제로썸(Zero-Sum) 게임'입니다. 한쪽에서는 신약 개발을 하라고 예산을 투입하고, 다른 쪽(건강보험 부서)에서는 '재정 안정'을 내세워 그 개발의 과실(시장)을 원천적으로 차단합니다. AI 반도체를 개발하라고 촉진 정책을 쓰면서도, 정작 반도체가 개발되자마자 '국내에는 기존의 가장 비싼 반도체보다 싸게 팔아야 한다'고 강제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과정에서 두 상반된 정책을 추진하는 예산이 서로를 상쇄시키며 낭비되고 있습니다.
모든 정책이 좋기만 할 수는 없습니다. 약가를 안정시켜 많은 사람이 건강해질 수 있게 하는 것은 국가의 중요한 역할입니다. 하지만 그 역할에만 주목한다면, 그와 상반된 '신약 개발 촉진' 정책은 폐기하거나 다른 측면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병주고 약주고 하는 주체는 행복하겠지만 대상은 힘만 빠지고 아무것도 변하는 것이 없습니다. 예전에는 '뭔가 어려운 것을 해본다'라는 기대라도 있었지만, 사회가 점점 단순하고 솔직한 것을 추구하는 시점에서 이율배반적인 정부의 정책방향은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4. 이중적 잣대를 멈추기 위한 두 가지 제언
그렇다면 이 모순적인 '제로썸 게임'을 멈추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첫째, 신약 정책의 주무 부처를 분리하는 것입니다. 현재 보건복지부 한 부처 내에서 '산업 진흥'과 '재정 통제'라는 상반된 목표가 충돌하며 문제를 해결할 동기를 잃었습니다. 배치되는 정책을 유지하는 것이 오히려 부처 예산을 지키는 데 유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신약 정책을 산업의 관점에서 보고 산업통상자원부 산하에 '신약산업국'을 신설하는 등 주무 부처를 이관하여, 부처 간의 공식적인 '협상'을 통해 합리적인 균형점을 찾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둘째, '이중 봉쇄'의 한 축인 비급여 통제를 푸는 것입니다. 건보 재정의 한계로 급여 등재가 어렵다면, 최소한 환자가 자신의 돈으로 약을 선택할 기회(비급여)는 열어주어야 합니다. 무조건적인 허용이 우려된다면, 일본이나 유럽 등 다른 제약 선진국에서 이미 책정되었거나 유통되는 가격을 기준으로 비급여 판매를 허용하는 방식을 검토할 수 있습니다. 정책 설계 능력이 낮아 근거가 없으면 움직이지 못하는 현실을 감안할 때, 이는 합리적인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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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사입니다. 근데 그냥 침만 놓는 사람 아닙니다. 한의학부터 사회 꼬집기, 경제·경영 및 기술까지— 세상이 던지는 말들에 한 마디씩 반사해봅니다. 오신 모든 분들,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