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용 화폐의 파티는 끝났다: 구조적 인플레이션의 귀환
금본위제가 폐기된 이후, 자본주의 국가에서 디레버리징(부채 축소)은 피할 수 없는 정기적인 고통이 되었습니다. 과거 금본위제 하에서는 통화량이 금 보유량에 연동되어 인위적인 신용 창출이 불가능했습니다. 화폐 가치와 실물 가치의 괴리가 생기면 시장은 즉각 반응하여 화폐를 매도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용 화폐 시스템이 도입되면서 인류는 합의에 의해 돈을 찍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난 20여 년간 현대통화이론이 득세하며 '돈을 풀어도 인플레이션은 없다'는 착각 속에 끝없는 부채의 향연을 즐겼습니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 그것은 공산권의 개방, 세계화, 그리고 베이비부머 세대의 풍부한 노동 공급이 만들어낸 일시적인 축복이었습니다. 이제 상황은 역전되었습니다. 세계화는 종말을 고했고, 생산의 주축이던 베이비부머는 은퇴하여 소비 주체로 돌아섰습니다. 노동 공급 부족과 노령화는 더 이상 돈을 푼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닌, 구조적인 인플레이션의 상수가 되었습니다.
2. 회색 코뿔소의 돌진: 외면해온 경고와 K자형 양극화
경제학에서는 멀리서도 눈에 잘 띄고 진동을 느낄 수 있을 만큼 거대하지만, 사람들이 애써 무시하다가 결국 큰 충격을 받는 위험을 '회색 코뿔소(Gray Rhino)'라고 부릅니다.
한국 경제는 이미 과거 두 차례의 고통스러운 구조조정 파고를 넘은 바 있습니다. 1997년 외환위기(IMF) 당시 기업들의 부실 부채를 강제로 축소해야 했던 과정이 '1차 디레버리징'이었다면, 2000년대 초반 무분별한 신용카드 남발로 수많은 신용불량자를 양산했던 카드 대란 사태가 가계 부문의 '2차 디레버리징'이었습니다.
이러한 학습 효과가 있었기에, 지금 한국 경제를 덮치고 있는 '3차 디레버리징'의 공포는 결코 갑작스러운 '블랙 스완'이 아닙니다. 우리는 인구 절벽, 가계 부채, 자영업 몰락이라는 회색 코뿔소가 맹렬히 달려오는 것을 지난 십수 년간 목격했습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부채를 줄일 골든타임이 있었음에도, 우리는 부동산 불패 신화와 '코로나 유동성'이라는 마취제에 취해 코뿔소의 돌진을 외면했습니다.
그 결과 한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극적인 인구 감소와 감당 불가능한 가계 부채를 동시에 떠안은 채 강제적인 디레버리징 구간에 진입했습니다. 이미 상가 공실과 자영업 폐업은 일상화되었습니다. 다만, 이번 위기는 과거와 달리 극심한 'K자형 양극화'로 나타날 것입니다.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일부 수출 대기업은 생존하겠지만, 내수 시장과 부동산에 의존하는 가계 경제는 회색 코뿔소의 뿔에 받혀 처참하게 무너질 가능성이 큽니다.
3. ‘인플레이션 택스’의 시대, 생산성만이 살길이다
미국과의 금리 역전을 더 이상 버티기 힘든 시점이 오면, 버블은 가장 약한 고리부터 터져 나갈 것입니다. 무리하게 빚을 내어 산 부동산은 경매로 쏟아질 것이고, 사회적 불신과 갈등은 최고조에 달할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정부는 딜레마에 빠질 것입니다. 재정 건전성을 위해 복지를 축소하는 '긴축'을 선택할 수도 있지만, 역사적으로 많은 국가는 빚의 실질 가치를 녹이기 위해 화폐 가치 하락을 용인하는 '인플레이션 택스(Inflation Tax)'를 선택해 왔습니다. 겉으로는 지원금을 주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치솟는 물가 속에 국민의 구매력을 거두어들이는 방식입니다. 부족한 노동력은 AI와 로봇으로 대체되겠지만, 이는 준비된 자에게는 기회이고 그렇지 못한 자에게는 생존의 위협이 될 것입니다.
앞으로 짧게는 5년, 길게는 10년의 사회적 구조조정이 이어질 것입니다. 이제 요행을 바라는 시세차익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부채를 줄이고 현금을 확보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생산성'입니다. 화폐 가치가 흔들리고 자산 거품이 꺼지는 혼돈 속에서, 실질적인 부를 창출할 수 있는 개인의 능력과 가치만이 코뿔소의 습격에서 살아남을 유일한 무기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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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사입니다. 근데 그냥 침만 놓는 사람 아닙니다. 한의학부터 사회 꼬집기, 경제·경영 및 기술까지— 세상이 던지는 말들에 한 마디씩 반사해봅니다. 오신 모든 분들,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