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 기획 기사 송고용 원고]
정부가 실패한 연구개발(R&D) 과제라도 성실성이 인정되면 패널티를 면제하고 후속 연구를 지원하는 ‘성실 실패(의미 있는 실패)’ 제도를 또다시 전면에 내걸었다. 지난 16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발표한 ‘2026년 하반기 업무계획’의 핵심 기치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적 연구 문화’를 만들겠다는 그럴듯한 명분이지만, 정작 과학기술계 안팎의 시선은 곱지 않다. 현장의 차가운 현실을 아는 이들은 이번 대책을 두고 “지방 대학에 무리하게 밀어붙인 기초연구과제들의 무더기 낙제를 막기 위한 행정적 ‘면죄부’이자 정부의 출구전략”이라는 뼈아픈 지적을 내놓고 있다.
13년째 재탕된 ‘성실 실패’… 기준 없어서 안 했나
사실 국가 R&D에서 성실하게 수행했다면 실패해도 책임을 묻지 않는 ‘성실실패’ 제도는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정부는 이미 지난 2013년 관련 규정을 개정하며 이 개념을 명문화했고, 이후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매년 단골 정책으로 내세웠다.
평가 기준 역시 이미 명확하다. 실시간으로 작성된 연구노트의 유무, 단계별 마일스톤 달성률, 예산 집행의 투명성, 그리고 실패 원인을 과학적으로 소명한 결과보고서 등 평가위원이 물리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객관적 잣대는 이미 제도화되어 있다. 그럼에도 정부가 이 타이밍에 또다시 같은 카드를 꺼내 든 배경에는 최근 급격히 악화된 ‘지방 R&D 현장의 붕괴’가 자리 잡고 있다.
“돈은 주는데 사람이 없다”… 고사 직전의 지방 대학 실험실
최근 몇 년간 ‘지역 균형 발전’이라는 정치적 명목 아래 지방 대학과 연구소에는 전례 없이 많은 기초연구 예산이 배정됐다. 하지만 현장의 실상은 처참하다. 학령인구 감소와 수도권 쏠림 현상으로 지방 대학원들은 극심한 ‘인력 가뭄’에 신음하고 있다. 실험을 설계하고 데이터를 분석할 석·박사 과정 연구원이 없어, 교수 혼자 불 꺼진 실험실을 지키는 곳이 태반이다.
연구를 수행할 ‘손’이 없는데, 계획서에 적힌 고난도의 실험 절차를 일정대로 수행하는 것은 애초에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이대로 과제 종료 시점이 도래하면 지방의 수많은 R&D 과제들은 무더기로 ‘불성실 실패’ 판정을 받아 연구비 환수와 참여 제한이라는 폭탄을 맞게 된다. 정부 역시 “지방에 세금만 퍼주고 부실 과제만 양산했다”는 치명적인 비판을 피할 수 없는 외통수에 몰린 셈이다.
이 타이밍에 구원투수처럼 등장한 ‘성실 실패 전면 허용’은, 결국 정부의 정교하지 못한 정책 설계와 현장의 인력 붕괴를 행정적으로 덮고 가기 위한 가장 편리한 퇴로라는 의구심이 드는 이유다.
‘기획은 지방, 수행은 수도권’… 현실적 대안과 딜레마
전문가들은 이 악순환을 끊기 위해 현실적인 게임의 규칙 변화가 필요하다고 제언한다. 대표적인 방안이 ‘돈과 기획권은 지방이 쥐되, 실제 수행은 인력이 풍부한 수도권과 협력하는 컨소시엄’ 모델이다.
지방 대학이 사업단으로서 기획과 예산 집행을 주도하고, 인적 자원이 과밀된 수도권 대학을 수행 파트너로 참여시켜 실제 실험과 데이터 산출을 분담하게 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지방 R&D 예산의 명분을 지키면서도, 인력 부족으로 인한 물리적 연구 실패를 원천적으로 막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정교한 안전장치가 없다면 또 다른 기형적 구조를 낳을 뿐이다.
- 수도권 하청 기지화: 돈은 지방이 주고 실제 궂은 실험은 수도권 대학원생이 대리 수행하는 구조가 고착화되면, 정작 핵심 연구 노하우와 원천 기술력은 전부 수도권에만 쌓인다. 지방 대학은 행정 대리인으로 전락해 기술 자생력을 완전히 잃게 된다.
- 도덕적 해이와 무임승차: 직접 실험을 책임지지 않는 지방 대학이 실현 가능성 낮은 부실한 기획을 남발할 수 있고, 과제 실패 시 서로 책임을 전가하는 공방만 남을 수 있다.
- 실질적 예산 유출: 명목상 지방 육성 예산이지만 인건비와 재료비 등 막대한 예산이 컨소시엄 계약을 통해 수도권 대학으로 흘러 들어가, 결국 수도권 배만 불려주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땜질식 행정 대신 ‘인프라 체질 개선’ 나서야
결국 협력형 컨소시엄이 작동하려면 ‘핵심 원천 기술 분석 및 최종 검증’ 단계를 지방 대학에 의무 배정하는 등의 정교한 룰 세팅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정부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사람이 없어 실패했으니 벌은 주지 않겠다"는 식의 안일한 면죄부 처방이 아니다. 지방 대학이 주도하되 수도권 인력을 유연하게 공동 활용할 수 있는 법적·제도적 판을 깔아주고, 궁극적으로 우수 인재가 지역에 정착할 수 있는 인적 인프라의 체질 개선에 나서는 것이다. 뼈대가 부실한 상태에서 얹어지는 규제 완화는 세금의 방만한 지출을 합리화하는 핑계로 전락할 뿐이다.
본 보도자료(오피니언)는 IHCM 융합임상의학연구소의 연구 생태계 상생을 위한 대안 제시의 일환으로 발행되었습니다.
- 기획/집필: 이재철 (IHCM 융합임상의학연구소 소장 /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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