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주식의 신 : 09시 00분의 해방
새벽 네 시의 한강 다리 난간은 손바닥이 얼어붙을 만큼 차가웠다.
남자는 그 난간을 쥐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리한 신용 대출과 영혼까지 끌어모았던 바이오 급등주가 거래정지 처분을 맞던 날, 그에게 남은 것은 마이너스 수억 원의 부채와 텅 빈 통장, 그리고 쫓아오는 독촉뿐이었다. 가족도, 내일도 사라진 자리에서 남은 길은 검은 물속으로 몸을 던지는 것뿐이라 믿었다.
차가운 강바람이 뺨을 때릴 때, 남자의 머릿속 한계선이 뚝 끊어졌다. 수년간 피를 말리며 들여다보던 호가창의 잔상과 수만 시간의 차트 파동이 주마등처럼 폭발하더니, 기이할 정도로 고요한 무감각이 찾아왔다. 돈을 벌고 싶다는 지독한 탐욕도, 죽고 싶다는 처절한 공포도 하얗게 증발해 버렸다.
남자는 완전히 비어버린 껍데기가 되어 난간에서 내려왔다.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뇌리를 스친 기이한 환각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단칸방으로 돌아와 먼지 쌓인 모니터를 켜고 오전 9시 정규장을 맞이했을 때, 세상의 법칙이 뒤틀렸다.
호가창에 숫자가 찍히기 0.1초 전, 망막 위에 다음 체결가가 유령처럼 먼저 번져 나왔다. 그리고 정확히 0.1초 뒤 전산이 그 숫자를 찍었다. 남자가 아무런 감정 없이 마우스를 누르자 계좌에 파란색 대신 붉은 수익이 찍혔다. 시차는 1초, 1분, 급기야 장마감 시점의 종가까지 고무줄처럼 늘어났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트레이더들의 공포와 탐욕, 알고리즘의 연산 궤적이 마치 이미 굴러떨어진 주사위의 눈처럼 손바닥 위에 펼쳐졌다.
그는 하루아침에 미래를 100% 내다보는 '주식의 신'이 되었다.
그러나 절대적인 권능에는 서늘한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그가 과거처럼 거대한 욕망을 품고 수십억을 베팅하려 들면, 그 욕심이 호가를 흔들어 미래의 상(像)을 깨뜨렸다. 미래를 보려면 자신이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차가운 거울이어야만 했다.
신이 된 남자는 규칙을 정했다. 레버리지는 쓰지 않는다. 하루에 딱 1,000만 원만 굴린다.
그에게 09시부터 15시 30분까지의 장중 시간은 전쟁터가 아니라 정수기에서 물을 받는 기계적인 일과였다. 상한가로 직행해 돈이 묶이는 종목 대신, 장중 파동을 무한히 그리는 테마주 사이를 징검다리 건너듯 밟아가며 매일 수백만 원을 거두었다. 장이 끝나면 한 푼도 남기지 않고 수익금을 인출해 계좌를 비웠다.
그렇게 수십 년이 흘렀다. 그는 금융 당국의 레이더에도, 국세청의 감시망에도 걸리지 않는 완벽한 투명인간으로 늙어갔다.
그러나 모든 것을 아는 대가는 지독했다. 세상은 이미 결말을 열 번도 넘게 돌려본 녹화 테이프 같았다. 야구 경기는 1회에 이미 스코어가 보였고, 사람들의 얼굴에서는 수년 뒤 닥칠 비극이 읽혔다. 어떤 설렘도, 슬픔도, 기쁨도 찾아오지 않았다. 그는 살아있으나 숨을 쉬지 않는 박제된 영혼과 같았다.
운명이 뒤집힌 것은 어느 초겨울 저녁이었다.
15시 30분에 장을 마감하고 멍하니 걷던 골목길, 축축한 담벼락 밑에서 빗물에 젖어 떨고 있는 손바닥만 한 어린 길고양이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원래의 그였다면 내일 숨을 거둘 생명의 궤적을 무심히 관찰하고 지나쳤을 터였다.
하지만 그날은 알 수 없는 충동에 고양이를 품에 안았다. 집으로 데려와 마른 수건으로 털을 말리고, 따뜻한 우유를 숟가락으로 입가에 흘려 넣어주었다. 작고 미약한 생명이 눈을 깜빡이며 그의 거친 손가락을 핥았을 때, 뼈마디까지 시려오던 적막 속에서 쿵, 하고 작은 심장의 박동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그날 밤 남자는 얼어붙었던 가슴 밑바닥에서 피어오르는 미열을 느꼈다.
이튿날 아침, 남자는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평소라면 모니터로 향했을 시선이 방구석의 종이상자로 먼저 향했다. 고양이는 담요 속에서 색색 고른 숨을 쉬고 있었다.
"살아있구나, 다행이다."
남자는 상자 곁에 쪼그려 앉아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오늘 장 끝나면 병원에 데려가 예방접종도 맞히고, 오는 길에 푹신한 방석도 하나 사 와야겠네."
그것이었다.
돈을 벌고 싶다는 탐욕만이 욕망이 아니었다. 내일 이 작은 생명과 함께하고 싶다는 소박한 기대, 저녁에 방석을 사 오고 싶다는 지극히 인간적인 소망. 그 온기 어린 마음이, 세상을 비추던 완벽히 비어 있던 거울에 가장 무거운 돌을 던진 것이었다.
09시 00분, 모니터가 켜졌다.
남자는 멍하니 호가창을 바라보았다. 붉은색과 푸른색 숫자들이 요동쳤지만, 늘 망막 위에 유령처럼 어리던 다음 호가의 잔상이 단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그저 어디로 튈지 모르는 혼란스럽고 무작위적인 숫자들의 파편뿐이었다.
신호가 끊어졌다.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마우스를 쥐고 있던 검지손가락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심장이 거세게 뛰고 손바닥에 땀이 맺혔다. 수십 년 만에 돌아온 공포, 그리고 전율.
발치에서 종이상자를 빠져나온 새끼 고양이가 비틀거리며 다가와 그의 바짓가랑이에 머리를 부볐다. 남자는 떨리는 손으로 고양이를 안아 올려 무릎에 앉혔다. 그리고 책상 서랍에서 매일의 타점을 적어 내려가던 낡은 수첩을 꺼내, 매매 기록이 끊긴 마지막 장에 연필로 천천히 눌러 썼다.
09시 00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마침내 내일이 기대되기 시작했다.
남자는 증권 프로그램을 영구 삭제했다. 남은 잔고를 모두 인출하고, 고양이의 이름을 '나비'라 지은 뒤 미련 없이 도시를 떠났다.
한적한 시골 마을에 작은 목공소를 차린 남자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다.
09시가 되면 호가창 대신 대패를 잡았지만, 나비가 도면 위에 드러누워 하품을 하면 작업을 멈추고 녀석의 턱을 긁어주었다. 나무를 잘못 깎아 의자 다리가 삐뚤어지면 화를 내는 대신 맑게 웃었다. 실패할 수 있다는 것, 내일 날씨가 어떨지 몰라 비 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는 것이 눈물겹도록 아름다웠다.
나비가 늙어 제 수명을 다하고 감나무 밑에 묻히던 날, 남자는 아이처럼 펑펑 울었다. 결과를 미리 알고 체념하는 신의 눈물이 아니라, 누군가를 끝까지 사랑하고 그 상실을 온전히 감당하는 '인간의 눈물'이었다.
세월이 흘러 노인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낡은 수첩은 한 천재 퀀트 연구원의 손에 들어갔다.
연구원은 오차율 0%의 기괴한 타점에 경악하며 비밀 공식을 풀기 위해 수천 대의 서버를 돌렸지만, 끝내 수첩의 마지막 문장을 마주하고는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자신이 쫓던 미래의 예측이란 결국 삶을 말려 죽이는 독배였음을, 미래를 쥐었던 신은 인간의 불완전한 오늘로 탈출하고 싶어 했음을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연구원은 사직서를 던지고 노인의 빈 목공소를 찾아갔다. 그리고 숲으로 떠나기 전날 밤, 세상이 탐욕으로 침을 흘리던 그 낡은 수첩을 목공소 난로에 던져 넣었다.
수천억 달러의 가치라 불리던 기록들은 주황색 불꽃 속에서 파랗게 타오르며 5분 만에 한 줌의 재가 되었다. 연구원은 그 식어버린 잿더미를 깡통에 담아, 마당 구석 나비가 묻혀 있는 어린 감나무 뿌리 밑에 거름으로 묻어주었다.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내일의 주가를 맞추기 위해 눈을 붉히고 피를 말린다.
그러나 모든 미래를 소유했던 자가 남긴 마지막 흔적은 어느 시골 마당의 감나무 잎을 푸르게 틔우는 흙이 되었을 뿐이다.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기에, 비로소 살아갈 수 있는 눈부신 아침 햇살을 받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