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철학

체면의 사회주의, 교차보조의 종말

상계동백곰 2026. 9. 23. 20:34

보이지 않는 곳에서 치러온 가격: '교차보조'가 지탱한 압축성장

 

병원 대기실에 앉아 있는 환자들은 겉보기에 모두 평등해 보입니다. 같은 진료실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똑같이 친절한 의료진의 안내를 받습니다. 그러나 진료가 끝나고 수납창구에서 진료비를 알려주고 결제하는 모습에서 보이지 않는 차이가 드러납니다. 원가 이하로 묶인 건강보험 급여 치료만 받는 환자가 있고, 비급여 치료를 섞어 받는 환자가 있습니다. 병원 경영의 관점에서 보면, 비급여 치료를 받은 환자가 지불한 비용이 급여 환자의 적자를 메워주며 병원 문을 열어두고 있는 셈입니다.

 

식당도 마찬가지입니다. 손이 많이 가고 원자재 부담이 큰 안주를 저렴하게 내놓을 수 있는 이유는 애주가들이 마시는 소주와 맥주의 높은 마진 덕분입니다. 술을 마시지 않고 안주만 먹는 손님은 다른 손님의 술값으로 식사비를 할인받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경제학에서는 이를 '교차보조(Cross-subsidization)'라 부릅니다.

 

한국 사회는 유독 이 교차보조를 광범위하게 활용해 왔습니다. 자본 축적이 부족하던 고도성장기, 국가는 복지와 인프라를 직접 세금으로 구축하는 대신 민간의 팔을 비틀고 규제로 가격을 묶었습니다. 병원에는 저수가를 강제하는 대신 비급여라는 뒷문을 열어주었고, 대학에는 15년 넘게 등록금을 동결하는 대신 연구과제에 대한 높은 간접비로 적자를 메우게 했습니다. 전세 제도 역시 세입자의 저렴한 주거 비용을 집주인이 '미래의 집값 상승(자본이득)'에 대한 기대로 대신 내주는 사적 금융 교차보조였습니다. 겉으로는 저렴한 의료, 높은 대학진학률, 안정된 주거라는 기적이 펼쳐졌고, 전 세계는 한국의 효율적인 모델에 찬사를 보냈습니다.

 

청년의 미래를 갈아 넣은 외상 장부와 청구서의 도착

 

그러나 공짜 점심은 없습니다. 국가가 치러야 할 공공의 비용을 민간에 떠넘기고, 기성세대의 안정된 복지를 미래 세대의 자원으로 지탱해 온 교차보조는 심각한 자원 왜곡을 낳았습니다. 전공의 사직 사태는 주 80시간의 저임금 노동을 훗날 전문의가 되어 보상받을 수 있으리라는 '미래 어음'이 부도났음을 확인한 청년 의사들의 이탈이었습니다. 빌라 전세사기와 월세 난민의 급증은 다음 세대가 더 비싼 값에 집을 사주지 않으면 유지될 수 없는 전세 피라미드의 균열을 보여줍니다.

 

기성세대가 누려온 저비용 고효율 사회의 청구서는 결국 청년 세대의 어깨 위에 고스란히 얹혔습니다. 청년들은 이 기형적인 교차보조 피라미드에서 합리적인 탈출을 선택했습니다. 번식을 멈춤으로써 새로운 비용 분담자의 유입을 차단하는 초저출산(0.7명대)과, 보상 없는 성장을 거부하는 생산성 정체로 응답한 것입니다.

 

이제 피라미드의 기초공사를 받쳐줄 인구 자체가 사라졌습니다. 금리마저 정상 궤도로 복귀하며 무이자 레버리지와 공기업 채권 돌려막기의 숨통도 끊어졌습니다. 흔히 거시경제적 처방으로 거론되는 기술 혁신을 통한 생산성 향상이나 금리 인상을 통한 긴축만으로는 이 위기를 돌파할 수 없습니다.

 

AI나 자동화로 산업 생산성을 아무리 끌어올린다 한들, 필수의료의 손실을 비급여로 벌충하고 학부 적자를 연구비를 떼어 가는 것으로 때우는 '제도적 왜곡의 회로'를 그대로 둔다면 추가된 과실마저 기형적인 블랙홀로 빨려 들어갈 뿐입니다. 금리를 올려 유동성을 조이고 부채 거품을 털어내는 긴축 역시 자본 비용을 정상화할 수는 있어도, 국가가 가격을 원가 이하로 묶어둔 탓에 발생한 민간의 구조적 결손까지 바로잡지는 못합니다.

 

시스템의 기본 회계 장부 자체가 거짓 위에 서 있는데, 거시경제 지표 몇 개를 조정한다고 무너진 인프라가 되살아날 수는 없습니다. 지방 대학의 줄도산, 필수의료의 붕괴, 한전의 누적 부채 위기는 단순한 경기 순환의 문제가 아니라, 교차보조라는 외상 장부의 만기가 한꺼번에 도래했음을 알리는 경고음입니다.

 

'체면의 사회주의'를 걷어내고 정직한 가격을 마주할 용기

 

해결책의 원리는 단순합니다.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을 명확히 하고, 가격을 생산 원가에 맞추는 것입니다. 등록금을 자율화하여 교육의 질에 따라 차등화하고, 필수의료의 수가를 현실화하되 비급여를 통제하며, 전세를 걷어내고 지불 능력에 따른 월세 체제로 전환해야 합니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이 당연한 정상화를 극도로 두려워합니다. 여기에는 한국 특유의 '체면의 사회주의'가 깊게 뿌리박혀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인이 원하는 평등은 엄밀한 경제적 분배가 아니라, "남들 눈에 똑같이 대접받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는 겉모습의 평등입니다. 20억짜리 아파트 한 동 안에서 자가 소유자와 전세 세입자가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재벌과 기초수급자가 같은 대학병원 대기실에서 최고 수준의 전문의를 만나는 시각적 위장막을 지키고 싶어 합니다.

 

이러한 특성은 같은 동아시아 국가인 중국이나 일본과 비교해 보면 더욱 뚜렷해집니다. 중국은 노장(老莊) 사상에 뿌리를 둔 강한 실리주의가 있어 공원에서 태극권을 하더라도 남의 동작이 맞든 틀리든 '내 몸 편하고 내가 좋으면 그만'이라는 태도로 각자의 삶을 살아갑니다. 일본은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메이와쿠' 규범이 엄격하지만, 정해진 선만 넘지 않는다면 개인의 사적 영역이나 계급적 분수에 간섭하지 않습니다.

 

반면 한국은 조금만 가까워져도 사생활을 재단하고 남의 형편을 품평하는 유별난 상호 감시 문화가 있습니다. "멀쩡해 보이지 않으면 사람 취급을 안 한다"는 무언의 사회적 낙인이 존재하기에, 내 지불 능력에 맞춰 낮은 서비스를 선택하는 순간 곧장 '실패자'로 전락할 것이라는 집단적 공포에 짓눌려 있는 것입니다. 기술 발전이나 금융 정책 같은 외과적 수단이 작동하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문제는 경제 수치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성원 전체가 결탁해 지탱해 온 '체면의 위장'이라는 거대한 심리적 카르텔이기 때문입니다.

 

놀이공원에서 돈을 더 내고 줄을 빨리 서는 패스트트랙 티켓조차 정서상 용납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라면 낸 만큼 대접받는다"는 차등의 풍경을 견뎌내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체면을 위해 미뤄온 대가는 이미 인프라의 붕괴라는 실물 재앙으로 닥쳐오고 있습니다. 남의 시선에 갇혀 가짜 평등의 환각에 매달릴 것인가, 아니면 체면을 내려놓고 투명한 원가와 정당한 복지 비용을 분담하는 냉혹한 현실을 받아들일 것인가. 교차보조의 수명이 다한 지금, 한국 사회가 마주한 마지막 질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