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정책

자본의 가격과 진자의 주기: 연대와 자율의 사회적 동학

상계동백곰 2026. 9. 6. 16:59

'연대(Solidarity)'라는 개념은 직관적으로 도덕적 우위를 점유하곤 합니다. 반면 그 대척점에 선 태도는 흔히 '각자도생'이나 '생존주의'라는 거친 프레임으로 환원되어 비판의 대상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회과학적 층위에서 이를 들여다보면, 이는 선악의 대립이 아니라 위험을 사회적으로 공동 풀링(Risk-pooling)할 것인가, 아니면 시장 규율과 개별 주체의 책임에 맡길 것인가에 관한 제도적 선택의 문제입니다.

 

1. 에이전시와 커뮤니언: 생존주의를 넘어선 자율적 적응성

심리학자 데이비드 바칸(David Bakan)[1]은 인간 실존과 공동체를 지탱하는 근원적 양식으로 타자와의 연결을 추구하는 '커뮤니언(Communion)'과 개체의 자율적 분리와 통제를 지향하는 '에이전시(Agency)'를 제시한 바 있습니다.

 

소위 생존주의로 폄하되던 태도의 학술적 실체는 야만이 아니라,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 개별 주체가 스스로 활로를 모색하는 자기주도적 적응력(Adaptive Agency)에 가깝습니다.

 

실제로 인류 역사에서 연대나 자율 어느 하나만 단독으로 작동한 적은 없습니다. 경제학자 폴 드 흐라우에(Paul De Grauwe)[2]가 《시장의 한계》에서 짚었듯, 사회는 국가의 개입(연대)과 시장의 자율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는 '거대한 경제적 진자(The Great Economic Pendulum)'의 주기 속에 존재합니다.

 

이는 칼 폴라니(Karl Polanyi)[3]가 명명한 '이중 운동(Double Movement)'과도 맥을 같이합니다. 시장 메커니즘이 지나쳐 사회를 파괴하려 들면 연대와 보호를 요구하는 반작용이 일어나고, 반대로 집단적 규제와 보호가 과도해져 사회가 경직되면 시장의 효율과 자율을 회복하려는 운동이 고개를 듭니다. 결국 시대마다 달라진 것은 두 가치의 유무가 아니라, '어느 축이 당대 체제의 모순을 해결하는 주도적 동력으로 작동하는가'의 차이였습니다.

 

2. '값싼 자본'의 시대와 팽창된 연대의 역설

지난 20~30년간 세계가 경험한 연대의 팽창 역시 거시경제적 조건의 산물이었습니다. 1990년대 이후의 세계화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이어진 초저금리 환경은 자본 조달 비용을 극도로 낮추어 놓았습니다.

 

이 '값싼 자본'의 시대에는 국가가 낮은 이자로 국채를 발행해 사회적 위험을 손쉽게 흡수하고 공공 안전망을 넓히는 일이 가능해 보였습니다.

 

예스타 에스핑-안데르센(Gøsta Esping-Andersen)[4]이 분석한 복지 체계의 '탈상품화(De-commodification)' 수준을 끌어올리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효율과 만성적인 생산성 정체는 풍부한 유동성 뒤로 가려졌습니다. 기업과 가계는 시장 규율에 따른 혁신과 구조조정보다는 저금리 대출과 공공 지원에 기대어 생존을 연장할 수 있었습니다. 즉, 연대 모델의 성공 이면에는 자본 비용이 거의 0에 수렴하던 시대의 특수성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3. 금리 정상화와 자율적 규율의 재발견

그러나 인플레이션 억제와 지정학적 긴장 속에서 '돈의 값(금리)'이 제자리를 찾으면서, 진자는 다시 반대편을 향해 요동치고 있습니다. 국채 이자 상환 부담이 국가 재정을 직접 압박하는 고금리 환경에서는 이전처럼 빚을 내어 위험을 무한정 떠안는 방식이 성립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자본의 기회비용이 커진 시대에는 부실한 영역을 정리하고 생산성이 높은 분야로 자원을 기민하게 재배치해야 하지만, 두터운 연대와 복잡한 이해관계 조정에 얽매인 구조는 의사결정의 지체를 낳고 사회 전체의 복원력을 떨어뜨립니다.

 

그 결과, 연대를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청년층에게 과중한 조세와 연금 부담을 지우며 미래 세대의 기회를 제약하는 구조적 모순마저 나타납니다.

 

연대 그 자체가 잘못된 이상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자본이 공짜에 가깝던 시절에 설계된 수혜형 연대의 방식이, 자본 비용이 비싸진 오늘날의 환경과 불일치를 일으키고 있을 뿐입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연대라는 당위에 갇혀 현실을 외면하는 것도, 파편화된 각자도생을 찬양하는 것도 아닙니다.

 

국가가 감당할 수 있는 안전망의 경계를 현실에 맞게 재정의하고, 개별 주체가 시장의 가격 신호에 반응하며 자율적으로 혁신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주는 일, 즉 진자의 흔들림 속에서 연대와 자율의 새로운 균형점을 찾아내는 정교한 현실 감각입니다.


[1] Bakan, D. (1966). The Duality of Human Existence: An Essay on Psychology and Religion. Rand McNally. [Google Books]

[2] De Grauwe, P. (2017). The Limits of the Market: The Pendulum Between Government and Market. Oxford University Press. [Oxford Univ. Press]

[3] Polanyi, K. (1944). The Great Transformation: The Political and Economic Origins of Our Time. Farrar & Rinehart (Reprinted by Beacon Press). [Google Books]

[4] Esping-Andersen, G. (1990). The Three Worlds of Welfare Capitalism. Princeton University Press. [Google Boo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