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철학

가장 오래된 코딩, 글쓰기가 AI를 만났을 때

상계동백곰 2026. 8. 19. 06:39

전자책 납본 지연에서 실감한 AI 출판의 물결

 

최근 전자책을 발간하며 국립중앙도서관에 납본을 신청했습니다. 예전 경험으로는 길어야 일주일이면 마무리되던 처리가 2주 넘게 지연되기에 담당 부서에 문의를 드렸습니다. 돌아온 답변은 최근 신청 도서가 폭증하여 몇 달 전 신청분을 순차 처리하고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담당자분께서는 AI의 영향으로 출판되는 책이 급증한 것 같다고 덧붙이셨습니다. 저 역시 AI의 도움을 받아 책을 내고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글쓰기의 최종 관문인 출판의 영역까지 AI의 파급력이 얼마나 깊숙이 들어왔는지 생생하게 실감했습니다.

 

AI는 글을 유려하게 만들어 줍니다. 오탈자를 잡아낼 뿐만 아니라 문장의 가독성을 크게 높여줍니다. 저는 스스로 만든 음식을 즐기듯, 제가 쓴 글이나 제작한 영상도 거듭 읽고 모니터링하며 음미하는 편입니다. 예전에는 글을 다듬고도 남는 어색한 문장이나 발견되는 오타 때문에 피로감이 컸지만, 지금은 훨씬 편안한 마음으로 글을 읽게 됩니다. 제 생각에서 출발한 글이지만 AI의 손길을 거치면서 정돈된 덕분에, 때로는 마치 완성도 높은 타인의 글을 읽는 듯한 신선한 감각마저 듭니다.

 

스타일의 희석인가, 생각의 정제인가

 

창작자의 입장에서 AI를 활용할 때 얻는 가장 큰 이점은 글의 줄기를 이루는 큰 흐름과 핵심 논리에 집중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세부적인 문장 표현, 맞춤법, 어휘의 호응 관계를 일일이 신경 쓰는 수고가 획기적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이제는 거칠게 쏟아낸 생각의 파편이나 핵심 키워드만 던져주어도, 저자의 의도에 충실하게 뼈대를 세우고 살을 붙여주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물론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단순히 키워드만 밀어 넣으면 천편일률적인 문맥이나 기계적인 두괄식·미괄식 구조를 반복하는 경향도 보입니다. 이 과정에서 작가 고유의 문체나 다소 불완전하더라도 개성 있던 표현들이 지워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회의가 들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AI 이전의 방식으로 돌아가기는 어렵습니다. 글을 쓰다 보면 누구나 특유의 매너리즘에 빠집니다. 저의 경우 산만한 전개나 지나치게 이질적인 분야의 사례를 무리하게 끌어오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AI가 교정한 글에서 간결해진 문장과 정제된 예시 활용을 보며 비로소 제 고질적인 글쓰기 습관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AI와의 협업은 글을 손쉽게 가다듬는 도구일 뿐만 아니라, 역으로 자신의 초고를 더 간결하고 명확하게 쓰도록 이끄는 훌륭한 교정 파트너가 되어주고 있습니다.

 

글쓰기는 가장 오래된 코딩이다

 

문장 표현의 편리함을 넘어, AI는 ‘자신의 글을 세상에 내놓고 싶다’는 사람들의 본원적인 바람을 실현해주고 있습니다. 최근 프로그래밍 영역에서 가장 널리쓰는 언어가 C나 파이썬이 아닌 ‘인간의 자연어(영어)’라는 말이 나오듯, 코딩의 진입 장벽은 무너지고 있습니다. 복잡한 문법을 몰라도 머릿속의 설계를 언어로 명확히 설명할 수 있다면 원하는 프로그램을 구현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글쓰기 역시 본질적으로는 ‘가장 오래된 코딩’입니다. 프로그래밍 언어가 사람과 컴퓨터 간의 소통 체계라면, 글쓰기는 사람과 사람의 생각을 잇는 소통의 인터페이스입니다. AI를 통해 인간의 언어로 컴퓨터를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면, 사람과 사람을 잇는 글쓰기 역시 더 유연하고 직관적으로 진화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쏟아지는 책들 중에는 양산형 텍스트도 섞여 있겠지만, 대다수는 표현의 문턱에 가로막혀 있던 저자들의 생각이 비로소 세상에 닿기 시작한 결과일 것입니다.

 

고전적인 집필 방식이 퇴색되는 것을 아쉬워하기보다, 자신의 고유한 관점과 맥락을 충실히 담아내는 질문(프롬프트)을 설계하는 것이 지금 시대의 창작자에게 필요한 자세입니다. 오늘날 AI 혁신의 중심에 ‘거대언어모델’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은, 앞으로 언어와 글쓰기라는 영역이 그 어떤 분야보다도 깊고 역동적인 확장을 맞이하게 될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