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투자

반도체 이후, 신약이 미래먹거리가 될 때 생기는 일

상계동백곰 2026. 8. 4. 09:02

반도체 착시와 경제 역성장의 공포: 쏠림이 가져온 피할 수 없는 굴레

 

AI 붐도 예전 같지 않고, 삼전·닉스로 대표되는 반도체 주들의 주가는 바닥을 모르는 채 떨어지고 있습니다. 앞으로 몇 년간의 주문이 쌓여있다고는 하지만 이는 이미 주가에 선반영된 상태입니다. 게다가 AI 생태계는 점차 추론 모델 자체의 우수성보다는 이를 연산할 시스템의 의존도가 높아지는 인프라 산업의 성격을 띠어가고 있습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초기 구축이 완료되고 나면 곧바로 '수요의 절벽'을 마주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결국 반도체 산업이 지닌 숙명과도 같은 업황 사이클의 굴레입니다.

 

문제는 현재 한국 경제가 반도체 이외에는 성장을, 아니 역성장을 방어할 산업이 없다는 점입니다. 주가가 화려하게 상승할 때조차 반도체를 제외한 다른 산업의 주가는 요지부동이었습니다. 특정 분야로의 쏠림이 그만큼 심했다는 뜻이며, 반도체가 저공비행을 시작하면 국가 전체 경제가 분기별 역성장을 넘어 연간 단위의 역성장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조선, 자동차, 2차전지 등은 중국의 추격이 매서울 뿐만 아니라 이미 국가적 역량을 기울일 대로 기울인 성숙기 산업이기에 폭발적인 추가 성장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이에 따라 반도체의 빈틈을 메울 수 있을 만큼 시장 규모가 크면서도 한국의 제조 역량을 즉시 이식할 수 있는 '신약 산업'에 관심이 쏠리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수순입니다.

 

18년 골골대는 가성비 건보와 '소득 4만 달러'의 시각 차이

 

그럼에도 신약을 국가 주력 미래 먹거리로 과감히 내세우지 못하는 것은 단순한 기술이나 자본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그 이면에는 건강보험제도 및 미국과의 통상 마찰이라는 거대한 암초가 깔려 있습니다.

 

전 세계의 모든 빅파마는 신약을 개발하면 미국에 가장 먼저 출시합니다. 미국은 FDA 허가 후 한두 달 만에 약가 통제 없이 제값을 인정해 주어 천문학적인 R&D 비용을 회수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민간 중심의 비싼 의료체계를 가졌지만, 돈 있는 부유층은 연간 수만 달러의 컨시어지 메디컬을 통해 전신 MRI, 액체 생검, 최신 유전자 치료제를 병이 나기 전부터 활용합니다. 이들은 80세가 넘어서도 청년급 신체를 유지하며 원하는 활동을 하다가 짧게 앓고 사망하여, '수명과 건강나이(Healthspan)'의 격차가 거의 없습니다.

 

반면 한국은 유독 수명과 건강나이의 격차가 큰 나라입니다. 국민건강보험이 저가 복제약과 당연지정제, 그리고 의료진의 3분 진료로 대표되는 저수가를 통해 어떻게든 '당장 죽지 않게 하는' 의료 접근성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올려놓았습니다. 하지만 기대수명이 83세를 넘을 동안 건강수명은 65세에 머물러, 대다수 국민은 노년의 18년을 하루 6~8알의 건보 약을 먹으며 골골대는 '유병 장수'를 강요받아 왔습니다.

 

이런 격차를 그동안은 저렴한 건보료라는 가성비로 메워왔지만, 국민소득 4만 달러 시대에 이르러서는 국민들의 요구가 급변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감기약 헐값에 받고 죽지 않게 해주는 '생존 의료'를 넘어, 킴리아나 졸겐스마 같은 한 번에 수억~수십억 원을 호가하는 초고가 신약에 빨리 접근해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다가 건강하게 죽는 의료'에 대한 강력한 수요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통상 마찰의 외통수와 건강보험제도의 피할 수 없는 와해

 

문제는 한국이 신약을 열심히 만들어 미국에 본격적으로 팔기 시작할 때 발생합니다. 아직까지는 한국의 신약 시장 비중이 작고 대미 의약품 적자국이기에, 미국 통상대표부(USTR)가 Special 301조 보고서 등을 통해 한국의 '낮은 약가 책정 제도'를 경고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이 신약을 대거 개발해 미국 시장에 판매하게 되면, 자국의 약가를 강력한 독점 구매자(건보공단)의 지위를 이용해 반값 이하로 후려치는 한국의 건강보험제도를 미국이 놔둘 리 만무합니다. 상호주의를 내세우며 "미국 신약에도 미국 수준의 약가를 보장하라"는 통상 보복 압박을 가해올 것입니다.

 

이때 한국 정부가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딱 두 가지뿐입니다.

  1. 건강보험료를 현재의 2~3배 이상으로 폭등시켜 미국산 초고가 신약의 약가를 건보 재정으로 다 대주는 것.
  2. 건보 보장 리스트에서 초고가 신약을 배제하고 시장 자율의 '비급여'로 허용해 주는 것.

 

국민 저항과 경제 마비를 부르는 건보료 폭등은 정치적으로 불가능하기에, 결국 정부는 표면상으로 체면을 세우는 위험분담제(RSA) 같은 꼼수를 넘어서 신약의 비급여화와 민간 사보험/개인 자본으로의 이관을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곧 ‘국민건강보험제도의 실질적 와해’를 의미합니다. 건보공단은 길 가다 쓰러졌을 때나 기초 질환을 담당하는 1차 안전망으로 축소되고, 돈 없는 사람은 건보가 보장하는 저가 복제약을 먹으며 골골대고, 돈 있는 사람은 비급여와 프리미엄 사보험으로 최첨단 신약을 쓰며 건강나이를 극대화하는 '의료 이중화(Two-Tier System)' 시대가 열리는 것입니다.

 

결국 반도체 이후의 먹거리로 신약 산업을 선택하는 순간, 한국은 오랜 시간 유지해 온 '건강보험 가성비 신화'를 스스로 깨뜨려야만 하는 서늘한 외통수에 직면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