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없어 실험 못 하는데 '성실실패' 용인? 지방 R&D의 씁쓸한 행정적 출구전략
지방 대학의 연구실을 지키고 계신 분들이라면 최근 정부가 발표한 ‘2026년 하반기 업무계획’ 속 “실패한 R&D라도 성실함이 인정되면 후속 연구를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보며 씁쓸한 입맛을 다시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겉보기에는 ‘도전과 혁신을 장려하는 선진국형 연구 문화’를 정착시키겠다는 그럴듯한 슬로건이지만, 현장의 차가운 현실을 아는 이들의 눈에는 이 제도가 다르게 읽히기 때문입니다. 바로 무리하게 밀어붙인 지방 기초연구과제 몰아주기 정책의 ‘행정적 면피용 출구’가 아니냐는 의구심입니다.
이미 10년도 더 전부터 명확했던 '성실수행' 기준
사실 국가 R&D에서 '성실하게 수행했다면 실패해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이른바 성실실패(성실수행 인정) 제도는 결코 새로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정부는 이미 2013년 국가연구개발사업 관리 등에 관한 규정을 개정하면서 이 개념을 명문화했고, 이후로도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매년 단골 정책으로 우려먹어 왔습니다.
게다가 법령과 평가 매뉴얼상에는 성실성 여부를 판정하는 기준 역시 매우 구체적으로 확립되어 있습니다.
- 실시간으로 작성된 연구노트의 유무와 신뢰성
- 최초 계획 대비 단계별 마일스톤의 실제 달성률
- 예산 집행이 적법하고 투명하게 쓰였는지를 보여주는 영수증과 구매 이력
- 실패 원인을 과학적으로 소명한 최종 결과보고서의 충실도
이처럼 평가위원이 물리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객관적 잣대는 이미 명확하게 존재해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왜 10년이 지난 지금, 마치 전에 없던 혁신적인 제도를 처음 도입하는 양 또다시 '성실실패 용인'을 들고나온 것일까요?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과제를 완수합니까
그 진짜 배경에는 최근 몇 년간 '지역 균형 발전'이라는 거대한 기치 아래 지방 대학과 연구소에 대거 배정된 기초연구 예산, 그리고 그 뒤에 가려진 참담한 현장의 실상이 있습니다.
예산서상의 숫자는 화려해졌지만, 수도권 쏠림 현상과 학령인구 감소의 직격탄을 맞은 지방 대학원들은 이미 만성적인 '인력 가뭄'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실험을 설계하고 밤샘 모니터링을 하며 데이터를 정제해 줄 석·박사 과정 연구원이 단 한 명도 없어, 교수 혼자 불이 꺼진 실험실을 지키는 곳이 허다합니다.
연구를 수행할 '손'이 없는데, 정부가 요구하는 높은 수준의 마일스톤과 복잡한 실험 절차를 일정표대로 수행해 내는 것은 애초에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미션이었습니다.
예정된 무더기 '실패', 그리고 찾아온 면죄부
이대로 과제 종료 시점이 도래하면 어떻게 될까요? 사람이 부족해 중간 절차를 건너뛰거나 실험 횟수를 다 채우지 못한 수많은 지방 과제들은 무더기로 '낙제점(실패)'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원칙대로라면 연구비 환수와 참여 제한이라는 무거운 페널티가 쏟아져야 하고, 이는 지방 연구 생태계의 완전한 붕괴로 이어집니다. 동시에 "지역을 살리겠다며 예산만 쏟아붓고 성과는커녕 부실 과제만 양산했다"는 매서운 정치적 역풍이 정책 입안자들에게 불어닥치게 됩니다.
이 난처한 타이밍에 다시금 전면에 등장한 '성실 실패의 전면 허용' 카드는 훌륭한 탈출구가 됩니다.
"비록 인력이 부족해 실험 절차는 다 채우지 못했고 목표도 달성하지 못했지만, 성실히 연구했으니 패널티를 주지 않겠다"는 논리. 이는 얼핏 연구자를 배려하는 따뜻한 정책 같지만, 실제로는 정부의 정책 설계 실패와 현장의 인력 붕괴 현상을 행정적으로 덮고 가기 위한 가장 편리한 면죄부에 가깝습니다.
현실적인 대안: '기획은 지방, 수행은 수도권' 컨소시엄
그렇다면 대안은 없는 것일까요? 사람이 없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지방 대학에 예산만 던져주고 알아서 살아남으라 하거나, 반대로 예산을 전부 빼앗아 수도권에만 몰아주는 것 외에는 길이 없는 것일까요?
가장 직관적이고 현실적인 해법은 '돈과 기획권은 지방이 쥐되, 실제 수행은 인력이 풍부한 수도권과 협력하는 판'을 짜는 것입니다.
지방 대학이 주도하는 컨소시엄이나 사업단 형태로 과제를 설계하는 방안이 시작점이 될 수 있습니다. 지방 대학은 지역 산업과 연계된 연구를 주도적으로 기획하고 예산을 집행하는 컨트롤 타워 역할을 맡고, 수도권 대학은 인적 자원을 바탕으로 실제 실험과 데이터 산출을 분담하여 수행 파트너로 참여하게 하는 방식입니다.
이렇게 하면 지방 R&D 예산의 명분을 지키면서도, 수도권 대학원생 풀을 합법적으로 활용해 "사람이 없어서 실험을 못 하는" 물리적 실패를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남는 딜레마: '하청 기지화'와 '도덕적 해이'
물론 이 전략이 만병통치약은 아닙니다. 정교한 설계 없이는 다음과 같은 치명적인 부작용을 낳을 수 있습니다.
첫째, '수도권 하청 기지화' 우려입니다. 돈은 지방이 주고 실제 궂은 실험은 수도권 대학원생이 대리 수행하는 구조가 고착화되면, 연구 노하우와 원천 기술력은 결국 수도권에만 쌓입니다. 지방 대학은 기획·행정만 담당하는 주선자로 남게 되어 장기적인 기술 자생력이 완전히 고사할 수 있습니다.
둘째, '무임승차와 책임 전가'의 문제입니다. 실제 본인들이 몸으로 떼우며 실험할 것이 아니기에 지방 대학 측은 실현 가능성이 떨어지는 부실한 기획을 남발할 도덕적 해이에 빠지기 쉽습니다. 과제가 실패했을 때 "기획이 엉망이었다"는 수도권과 "실험을 불성실하게 했다"는 지방 사이의 책임 공방만 남을 수 있습니다.
셋째, 실질적인 예산 유출입니다. 명목상 지방 육성 예산이지만, 연구비의 상당 부분(실험 재료비, 수도권 대학원생 인건비 등)이 수도권 대학으로 흘러 들어가 결국 수도권 배만 불려주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땜질식 제도 개선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할 때
결국 이 대안이 작동하려면, 지방 대학이 단순 행정 대리인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핵심 원천 기술 분석 및 최종 검증' 단계는 지방 대학에 의무 배정하는 등의 정교한 안전장치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합니다.
지금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사람이 없어 실패했으니 봐줄게"라는 허울 좋은 퇴로를 열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지방 대학이 주도하되 수도권의 인력을 유연하게 끌어다 쓸 수 있는 '협력형 컨소시엄'의 정교한 판을 깔아주는 것,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지방 연구실에 우수한 인재가 실제로 유입되고 정착할 수 있는 인적 인프라의 근본적 개선입니다. 뼈대가 부실한 상태에서 얹어지는 유연한 제도 평가는, 결국 세금의 방만한 지출을 합리화하는 핑계로 전락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