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정책

오래된 미래: 영국 NHS 치과 파탄이 경고하는 한국 동네 병원의 내일

상계동백곰 2026. 7. 4. 01:27

최근 대한민국 의료계를 흔들고 있는 필수의료 공백과 실손보험 축소 등 의료 정책의 변화를 보고 있으면 기묘한 기시감이 듭니다. 이는 우리가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아닙니다. 이미 선진국들이 수십 년 전, 의료를 강하게 억압하고 통제하려다 피를 흘리며 지나온 ‘오래된 미래’에 가깝습니다. 그중에서도 2000년대 중반 이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영국 국민보건서비스(NHS)의 치과 인프라 붕괴 사태는, 급여와 비급여 시장이 위태롭게 공존하는 대한민국 동네 병원의 미래를 가장 날것 그대로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착한 가격의 덫과 UDA 사태: 공급자를 적대시한 규제가 부른 파국

 

2006년, 영국 정부는 치과의사들이 과도한 수입을 올린다는 여론의 비판에 직면하자 칼을 빼 들었습니다. 과잉 진료를 막고 재정을 아낀다는 명목으로 ‘UDA(Units of Dental Activity)’라는 새로운 계약 체계를 도입한 것입니다. 이는 의사가 들인 시간이나 치료의 복잡성과 관계없이, 강제로 동일한 헐값의 수가만 지급하는 통제 시스템이었습니다. 복잡한 신경치료를 하든 간단한 충치 치료를 하든 의사가 손에 쥐는 돈은 같아졌고, 고난도 환자를 볼수록 병원이 적자를 보는 기형적인 구조가 완성되었습니다.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정부가 규제로 이익을 쥐어짜자, 민간 사업자이기도 한 치과의사들은 시스템 자체를 이탈하는 방식으로 저항했습니다. 수많은 동네 치과들이 공공의료(NHS) 계약을 파기하고 100% 민간 비보험 진료(Private)로 전환하거나 아예 문을 닫았습니다. 이로 인해 수백만 명의 국민이 NHS 치과 예약을 잡지 못해 몇 년씩 대기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결국 집에서 펜치로 스스로 이빨을 뽑는 ‘DIY 치과’가 사회적 재앙으로 뉴스에 도배되는 비극을 낳았고, 이는 현재진행형입니다. 공급자의 생존과 인센티브를 무시한 통제가 어떻게 공공 인프라를 지옥으로 만드는지 보여준 상징적 사건입니다.

 

 "의사 수만 늘리면 된다"는 착각: 깨진 독에 물 붓기와 강제 의무의 한계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영국 정부는 뒤늦게 재정을 투입하고 치대 정원을 대폭 늘리는 한편, 해외 의사를 대거 유입하는 카드를 꺼내 들었습니다. 하지만 시장의 평가는 냉혹합니다. 문제는 ‘치과의사의 총합’이 아니라 ‘공공의료(NHS)에 남으려는 의사’가 없다는 본질을 외면했기 때문입니다. 시스템의 매력이 사라진 상태에서 의사 숫자만 늘려봐야, 새로 배출된 인력은 고스란히 쾌적하고 제값을 받는 민간 비급여 시장으로 흘러 들어갈 뿐입니다.

 

오히려 인력 유출을 막겠다며 영국 정부가 추진하는 "치대 졸업 후 일정 기간 NHS 의무 복무"와 같은 강제 조항은 현장의 환멸만 키우고 있습니다. 의무 복무 기간이 끝나자마자 젊은 의사들이 대거 민간으로 탈출하는 ‘엑소더스’가 고착화되면, 공공 치과는 숙련도 낮은 신출내기 의사들만 거쳐 가는 ‘징검다리’로 전락하게 됩니다. 6~7년의 교육 시차와 천문학적인 세금을 쏟아붓고도 인프라의 질적 저하를 막지 못하는 영국의 모습은, "의사 수만 늘리면 낙수효과로 필수의료가 살아날 것"이라는 한국 사회의 안일한 믿음에 정면으로 반박하는 살아있는 증거입니다.

 

대한민국에서 벌어질 각자도생의 풍경: 90년대 수지침을 넘어선 ‘셀프 의료 교육’의 성행

 

한국은 강력한 ‘건강보험 당연지정제’가 있어 영국처럼 의사가 공공 시스템을 완전히 탈퇴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다가올 미래는 훨씬 더 기형적이고 잔인한 ‘한국형 의료 붕괴’가 될 것입니다. 의사들은 당연지정제를 우회해 ‘급여 진료를 최소화하고 비급여로 연명하는 방식’의 합법적 탈출을 이미 시작했습니다. 겉보기에는 세계 최고의 미용·성형 인프라를 자랑하지만, 정작 내가 쓰러졌을 때는 나를 살려줄 바이탈(생명) 의사가 없어 구급차 안에서 숨을 거두는 ‘치명적 골든타임의 소멸’이 일상화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병원 문턱이 높아진 국민들이 결국 영국처럼 '자가 치료(셀프 메디케이션)'로 내몰리는 풍경이 현실화될 것입니다. 문득 우리는 1990년대 대한민국을 휩쓸었던 '수지침 열풍'을 떠올리게 됩니다. 당시 "내 몸은 내가 고친다"며 문화센터마다 미어 터지던 유료 강좌들은 의료 접근성의 틈새를 메우던 대중의 자발적 선택이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셀프 의료는 단순한 건강 취미가 아닌, 생존을 위한 처절한 각자도생의 영역이 될 것입니다. 조만간 우리는 온라인 클래스 플랫폼이나 유튜브에서 다음과 같은 기괴하고도 서글픈 유료 사설 교육들이 성행하는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릅니다.

 

  • "의사 없이 하는 홈 수술실": 해외 직구로 합법적으로 살 수 있는 의료용 스테이플러나 봉합 키트를 가지고, 아이가 찢어졌을 때 응급실 뺑뺑이를 도는 대신 집에서 직접 꿰매는 '셀프 봉합 술기' 강좌.
  • "AI와 함께하는 홈 내과": 챗GPT 같은 생성형 AI에게 처방전을 검증받고 성분을 분석해, 해외 직구로 전문 의약품을 직접 공수해 먹는 법을 알려주는 '스마트 직구 가이드'.
  • "실전 자가 침·뜸 마스터": 아프고 지쳐도 동네 한의원에 가기 힘들어지자, 아예 신체 해부학적 경혈 위치를 정확히 찍어주고 자가 흡입식 부항이나 침을 놓는 법을 가르치는 전문 유료 멤버십 커뮤니티.

 

90년대 수지침 유행이 자신과 가족의 건강을 돌보기 위한 보조적인 수단이었다면, 다가올 미래의 셀프 의료 유행은 무너진 공공 인프라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눈물겨운 생존 기술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전문가의 손길을 거치지 않은 셀프케어는 치료가 아니라 오히려 병을 키우는 부메랑이 되어, 종국에는 더 막대한 국가 건강보험 재정과 사회적 비용 파탄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셀프수술하다가 감염으로 화농이 된 환자, 해외 직구로 약물을 복용하다 간이나 신부전으로 응급실에 가는 사례, 스스로 침을 놓다가 폐를 찔러 기흉이 생기거나 뜸으로 인한 화상으로 피부가 손상되는 일이 드물지 않게 신문에 보도될 것입니다.

 

의사들에게 제도적 압박만 가했을 때, 의사들이 각자도생으로 떠나버린 그 황량한 벌판에서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것은 결국 우리 국민들입니다. 인프라를 무너뜨리는 것은 순식간이지만, 무너진 신뢰를 재건하는 데는 수십 배의 비용과 시간이 든다는 것을 영국의 오래된 미래가 엄중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 국민들이 이러한 파국을 예견하고도 감내하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의사들을 혼내주고 숫자만 늘리면 경쟁을 통해 어디서나 저렴하고 질 좋은 의료를 누릴 수 있다"는 환상에 빠져 있는 것인지 아직 분명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만약 전자라면 스스로 책임을 지는 선택이겠지만, 후자라면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어쩌다 의료가 이 지경이 되었나" 뒤늦게 탄식하며 허둥대다가 결국 아무런 해결책도 찾지 못하는 잔인한 미래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