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펙 과의존 시대의 종말
개인적 특성에서 사회적 구조로
최근 저는 AI와의 대화 과정에서 ‘임상 과의존’이라는 표현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성취와 사회적 성공을 개원이나 진료에만 의존하려는 사고방식을 지적하는 말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낯설고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한의사라면 결국 진료로 평가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오랫동안 당연한 전제로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 표현은 단순히 개인의 진로 선택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더 넓은 사회 구조의 변화를 암시하는 단서처럼 느껴졌습니다. 의료개혁이 병원 중심의 의료를 점차 축소하고 의료행위를 분산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흐름, 그리고 AI가 전문직 영역을 빠르게 잠식하고 있는 현실은 특정 직능 및 수단에 대한 과도한 의존이 더 이상 안전한 전략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저는 ‘임상 과의존’이라는 표현을 개인적 반성의 언어로만 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 사회 전반을 지배해 온 더 큰 현상, 즉 ‘스펙 과의존’의 종말을 암시하는 하나의 작은 신호처럼 보였습니다.
스펙 과의존의 시대와 그 균열
지난 20~30년간 한국 사회는 자격과 학력, 점수와 면허를 중심으로 개인의 능력을 평가해 왔습니다. IMF 이후 전문직 선호는 더욱 강화되었고, 의대·법대·공무원 시험 등은 안정성과 수익성을 동시에 보장하는 경로로 여겨졌습니다. 학위와 자격증은 곧 능력의 대리 지표로 기능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개인의 실제 수행 능력이나 특화된 경험보다, 서류로 증명 가능한 이력이 더 강력한 신호가 되었습니다. 국가 및 민간 자격증은 전성기를 맞았고, 석·박사 학위는 취업을 위한 기본 조건처럼 인식되었습니다. 한 때 취업 시장에서 가장 공신력 있는 시험점수가 영어시험인 '토익'일 때도 있었습니다. 그만큼 ‘스펙’은 단순한 준비 과정이 아니라 일종의 사회적 지위 장치로 작동했습니다.
그러나 인구 감소와 AI의 확산은 이 구조에 균열을 내고 있습니다. AI는 법률 문서 검토, 회계 처리, 연구 설계, 논문 초안 작성 등 그동안 고급 인력이 담당하던 영역을 빠르게 보조하거나 대체하고 있습니다. 전문직 내부의 주니어 업무는 이미 상당 부분 자동화되고 있으며, 대학 연구실도 인력 구조의 변화와 함께 연구를 수행하는 방법마저 변화하고 있습니다.
이 변화는 단순히 직업 일부가 사라진다는 의미를 넘어서, “자격을 통해 독점하던 영역”이 약화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스펙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경쟁 우위를 확보하기 어려운 환경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평가 기준의 전환과 새로운 준비
이러한 흐름이 지속된다면, 앞으로의 사회는 자격 보유 여부보다 실제 산출물과 성과를 중심으로 개인을 평가하는 방향으로 이동할 가능성이 큽니다. 어떤 학위를 가졌는지보다, AI를 활용해 무엇을 만들어냈는지, 어떤 문제를 해결했는지가 더 직접적인 판단 근거가 될 것입니다.
IT 산업에서 이미 일반화된 포트폴리오 중심 평가 방식은 점차 다른 분야로 확산될 수 있습니다. 연구자는 자신의 논문과 프로젝트 결과물로, 법률가는 실제 판결 사례로, 의료인은 데이터와 치료 결과로 평가받는 구조가 강화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스펙은 참고 자료로 남되, 절대적 지위 신호로 작동하던 힘은 약화될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변화가 직선적으로 진행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제도는 관성을 가지고 있고, 기존 이해관계도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자격 자체에 대한 과신은 점점 설 자리를 잃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은 더 많은 자격을 쌓는 일이 아니라,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실제로 가치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기르는 일일 것입니다. 동시에, AI가 대체하기 어려운 영역—신뢰 형성, 협업, 갈등 조정, 관계 유지와 같은 인간적 역량—은 더욱 중요해질 수 있습니다.
스펙이 사회적 안전망처럼 작동하던 시대가 저물어 간다면, 앞으로의 경쟁력은 ‘어떤 자격을 가졌는가’가 아니라 ‘어떤 결과를 만들어왔는가’로 질문이 바뀔 것입니다. 그 전환의 문턱에 우리가 서 있는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