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Silico and Research

기초의학연구에도 근거수준이 있을까?

상계동백곰 2026. 1. 11. 13:47

임상 의학의 '근거 중심' 흐름과 기초 연구의 암묵적 위계

 

지난 20년간 현대 의학은 '의사의 숙련도'라는 주관적 영역을 넘어, 근거중심의학(Evidence-Based Medicine, EBM)이라는 견고한 객관적 체계를 구축해 왔습니다. 과거 특정 병원에 가면 무조건 수술을 권유받던 시대와 달리, 이제는 진단 기기의 발달과 건강보험 시스템의 고도화로 인해 '입증된 치료'만이 사회적·경제적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특히 한국에서 나타난 의료비 효율화 시도는 '심평의학'이라는 자조 섞인 용어를 낳을 만큼 강력한 표준화의 흐름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명시적 근거 수준(Level of Evidence)은 임상 연구에만 국한되어 있을 뿐, 기초 연구 분야에서는 여전히 연구자들 사이의 '암묵적인 동의'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기초 연구의 질적 평가를 시도하는 SYRCLE과 같은 도구가 존재하지만, 연구 현장에서 필수적인 검증 기준으로 완벽히 정착하지는 못한 상태입니다. 하지만 상위 저널의 경향성을 살펴보면, 인체의 생명 현상을 얼마나 정교하게 대변할 수 있는 모델을 사용했는지에 따라 분명한 신뢰의 위계가 존재함을 알 수 있습니다.

 

생체 모사도와 기전의 완결성: 기초 연구의 신뢰도 위계표

 

기초 연구는 사람에게 가할 수 없는 유전체 조작이나 신경 절제 등 과감한 실험 방법을 통해 생명 현상의 본질에 다가갑니다. 여기서 핵심은 조작을 가하는 모델이 실제 목적 대상인 인간을 얼마나 잘 대변하는가입니다. 임상 EBM이 기존의 인정된 연구 설계(무작위 배정 임상시험, 코호트 연구, 단면연구, 환자-대조군 연구 등)의 엄격함에 집중한다면, 기초 연구의 근거 수준은 아래 표와 같이 '인간 생명 현상에 대한 근접도'를 기준으로 재구성될 수 있습니다.

 

[기초 의학 연구의 신뢰 수준 위계표 제안]

수준 연구 모델 주요 특징 근거의 핵심 가치
Level 5 영장류 (NHP) 인간과 유전적·생리적 최상 유사성 임상 시험 진입 전 최후의 보루로서의 신뢰성
Level 4 설치류 (In vivo) 신경·면역·내분비 시스템의 상호작용 행동학적 변화(Von Frey 등)를 통한 실제 표현형 입증
Level 3 오가노이드 (3D) 인간 세포 기반의 3D 조직 모사 2D 세포의 한계 극복인간 특이적 반응 확인
Level 2 인간 유래 세포 Primary cell, iPSC 등 활용 동물 모델의 종간 차이(Species bias) 문제를 직접 해결
Level 1 불멸화 세포주 2D Cell line (HeLa, HEK293 등) 기전 연구의 출발점이며 실험의 높은 재현성 확보
Level 0 In silico 시뮬레이션, 도킹 방대한 데이터 기반의 가설 생성 및 타겟 발굴

 

연구모델에 따른 신뢰 수준 뿐만 아니라 분석 방법에도 신뢰 수준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단순히 특정 단백질의 발현(Western Blot)을 보는 것을 넘어, Bulk/Single-cell RNA sequencing이나 Proteomics를 결합하여 유전체라는 생명 현상의 본질에 다가갈 때 연구의 신뢰도는 비약적으로 상승합니다. 이는 나무 한 그루의 변화가 아닌 숲 전체의 인과관계 사슬(Causal Chain)을 완결하려는 기초 과학의 현대적 문법입니다. 아래 그래프는 연구모델과 분석방법에 따른 신뢰 수준을 모식적으로 표현해본 그래프입니다. 수 많은 연구들을 이렇게 단순화 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 많은 의문이 제시될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논의의 시작을 위해 개념도를 만들었습니다.

 

 

중개 연구의 가교로서 의사연구자의 역할과 새로운 컨센서스

 

재미있는 점은 임상 연구와 기초 연구가 '데이터를 다루는 방식'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는 것입니다. 임상은 단 하나의 명확한 핵심 지표(Primary Endpoint)에 집중하지만, 기초 연구는 파편화된 여러 실험을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하나의 거대한 '스토리텔링'을 완성하는 것을 높게 평가합니다. 이는 변인 통제가 가능한 환경에서 개별적인 연구 시도들이 모두 생명 현상의 원리를 밝혀낼 것이라는 믿음에 근거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의사연구자(Physician-Scientist)의 존재 가치가 빛을 발합니다. 기초 연구의 방대한 데이터가 향하는 종착지는 결국 질병에서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이기 때문입니다. 수만 개의 유전자 변화 속에서 질병의 본질적 의미를 해석하고, 기초 연구의 성과를 임상적 가치로 치환하는 중개 연구(Translational Research)는 임상 현장을 이해하는 연구자만이 수행할 수 있는 고유 영역입니다.

 

이제 기초 연구에서도 암묵적으로 공유되던 신뢰 수준을 체계적으로 공론화해야 할 시점입니다. 이를 통해 연구 평가지표를 단순히 논문의 수에만 맡기지 않고, 연구 모델의 타당성과 기전의 완결성이라는 본질적 가치로 평가받는 건강한 컨센서스가 형성되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