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학의 통찰과 한국의 미래
1. 도시락, 경영학, 그리고 지정학의 귀환
동아비즈니스포럼에 다녀왔습니다. 2011년부터 매년 열리는 이 포럼은 세계적인 경영학 구루들에게 시대를 헤쳐나갈 통찰을 얻는 자리로 명성이 높습니다. 올해도 신라호텔에서 개최된 덕분에 공간도 쾌적했고 점심 식사도 훌륭했습니다. 분명 도시락처럼 상자에 담아주는데도 전혀 도시락을 먹는 기분이 들지 않더군요. 이런 디테일한 차이 또한 경영학적인 연구 대상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단순한 경영학 강의였다면 여운이 덜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기조연설자였던 지정학의 권위자 조지 프리드먼의 강연은 경영을 넘어 더 큰 질문을 던졌습니다. 한때 우리는 한반도가 '지정학적 요충지'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습니다. 중국과 러시아가 세계화에 편입되면서 그 의미가 퇴색되는가 싶었지만, 세계 질서가 재편되는 지금 지정학은 다시금 무시할 수 없는 화두로 떠올랐습니다.
2. 러시아의 몰락, 중국의 한계, 그리고 미국의 선택
프리드먼은 우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냉전의 완전한 종말'을 시사한다고 분석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전 세계의 질서를 재편하는 데 6년이 걸렸는데, 러시아는 4년 가까이 우크라이나를 온전히 지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선의 고착화는 러시아가 더 이상 미국을 위협할 수 있는 '소련급' 강대국이 아님을 증명하는 명백한 증거라는 것입니다.
중국은 과거 미국의 적대국들과는 다른 독특한 위치에 있습니다. 미국과 중국은 '협력과 경쟁'이 공존하는 이중적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한·일·필리핀을 잇는 안보 라인을 통해 중국을 군사적으로 견제하면서도, 동시에 경제적으로는 주요 교역 파트너로서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는 경제적 교류가 전무했던 냉전 시대의 소련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점입니다. 프리드먼은 이러한 복합적 관계와 중국의 신중한 태도를 근거로, 미·중 간의 전면전 가능성은 낮다고 전망했습니다.
무엇보다 중국의 군사적 한계가 명확합니다. 미국이 전 지구와 우주까지 작전 구역(Global Theater)으로 삼는 압도적 군사력을 보유한 반면, 중국은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지역적 군사 강국에 머물러 있습니다. 대양을 건너 미국 본토를 침공할 능력이 없는 상황에서, 미국 역시 굳이 자신의 힘을 세계 곳곳에 과시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트럼프 행정부를 비롯해 미국이 점차 세계 무대에서 개입을 줄이는 이유입니다. 프리드먼 본인의 자녀들이 군 복무 중이라고 언급한 대목에서는, 모병제 국가임에도 징병제 국가만큼이나 전쟁을 생활 가까이에 두고 있는 미국의 현실이 투영되어 있었습니다.
3. 세계의 공장, 그리고 통일 한국이라는 상상
현 상태의 한국에 대해 프리드먼은 '민첩성'에 높은 점수를 주면서도, 산업 다각화의 필요성을 조언했습니다. 이와 함께 가장 인상 깊었던 통찰은 '40년 주기의 수출 주도국 부상'론입니다. 세계의 공장은 미국에서 일본으로, 다시 중국으로 넘어갔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신생 독립국 미국, 패전국 일본, 공산주의 국가 중국이 세계의 공장이 되리라고는 누구도 쉽게 예측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프리드먼은 차기 세계의 공장 역시 남미와 같이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나올 수 있다고 말합니다.
'세계의 공장'이 되려면 과거의 미제나 일제, 그리고 지금의 알리나 테무처럼 생활 속 모든 물건을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한국도 한때는 가발, 안경테부터 컴퓨터 메인보드까지 'Made in Korea'를 붙여 팔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반도체 등 고부가가치 산업에 집중하고 있지만요.
여기서 상상의 나래를 펼쳐 봅니다. 만약 넓은 의미의 '통일 한국'이 실현된다면 어떨까요? 인구 1억 명 남짓의 규모에 자급자족이 가능하고 풍부한 노동력을 갖춘 나라, 여기에 로봇과 AI가 결합된 첨단 생산 공정까지 더해진다면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세계의 공장'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알리와 테무에 있는 모든 물건을 만들어 팔면서도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세계적인 강대국. 프리드먼이 말한 '전혀 생각지 못한 형태의 국가'가 바로 미래의 통일 한국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