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는 사회의 그림자: 치료의 시대에서 돌봄의 시대로
수명 연장의 이면, 달라진 질병의 양상
의료 체계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특성에 종속됩니다. 누구나 발전된 의료 기술을 원하지만, 싸고 좋은 기술은 쉽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실 인류의 건강 수준과 평균 수명을 비약적으로 늘린 1등 공신은 ‘신약’이나 ‘수술법’보다는 상하수도와 같은 위생 시설, 노동 환경의 개선, 사회 보장 제도 등 사람이 살아가는 제반 환경의 발전이었습니다.
과거에는 감염병이나 급성기 질환이 생사를 갈랐기에 위생과 방역이 수명 연장의 핵심이었습니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다릅니다. 이제는 만성질환과 노화로 인한 기능 저하를 안고 살아가는 기간이 길어졌습니다. 즉, ‘죽고 사는 문제’에서 ‘어떻게 앓으면서 살아갈 것인가’의 문제로 패러다임이 바뀐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금의 의료 시스템이 ‘치료(Cure)’에서 ‘돌봄(Care)’으로 거대한 전환을 겪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고도 성장기의 유산과 요양 제도의 딜레마
지난 20여 년간 한국 사회의 빠른 경제 성장기 동안 의료 역시 ‘치료 중심’의 시스템을 공고히 해왔습니다. 육체노동이 중심이던 시절, 하루의 결근은 곧 개인과 사회의 손실이었기에 빠르고 강력한 치료가 필요했습니다. 당시 의료 현장에서는 제한된 진단 기기와 정보 속에서도 의사의 권위와 경험에 의존해 환자의 상태를 판단해야 했습니다. 때로는 과도해 보이는 검사와 투약이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이는 ‘질병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공급자 중심의 적극적인 방어 기제이자 당시 사회가 요구한 최선의 대응이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암이나 중증 외상도 병원에서 해결할 수 있다는 높은 의료 접근성과 신뢰를 쌓았습니다.
그러나 초고령사회 진입과 함께 이 시스템은 한계에 봉착했습니다. 정부는 건강보험 재정 건전화를 위해 입원 치료가 불필요한 환자들을 병원에서 집으로 돌려보내려 합니다. 요양병원의 병상 수를 대폭 줄이고, 의료적 처치가 시급하지 않은 환자는 방문 진료를 통해 해결하겠다는 구상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습니다. 고정된 방문 진료 수가는 의료진에게 동기를 부여하기 어렵고, 결국 접근성이 좋은 일부 지역 환자만 혜택을 볼 뿐 다수는 의료 사각지대에 놓일 위험이 큽니다.
국방이나 과학 기술 예산은 국가 존립과 미래를 위해 함부로 줄이지 못하는 ‘상수’에 가깝습니다. 반면 복지 성격이 강한 의료 예산은 경제 위기 시 질적 저하가 가장 먼저 일어나는 ‘변수’입니다. 전쟁 중인 국가에서 복지가 먼저 멈추듯, 경제적 여력이 줄어들면 의료의 ‘돌봄’ 기능은 축소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취약성을 가집니다.
저금리의 팽창이 끝난 시대, 병원의 새로운 생존법
많은 원장님께서 최근 병원 경영의 한계를 느끼시는 이유는 비단 경쟁 심화 때문만은 아닙니다. 저는 이를 ‘저금리 시대의 치료 위주 의료’에서 ‘고금리 시대의 돌봄 위주 의료’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현상으로 분석합니다.
지난 20년간 저금리 기조하에서는 빚을 내서라도 최신 장비를 도입하고 병원의 규모(하드웨어)를 키우는 것이 성공의 방정식이었습니다. ‘치료’가 목적이었기에 시설과 인력의 투입이 곧 경쟁력이었습니다. 하지만 고금리 시대이자 저성장 국면인 지금은 다릅니다. 이제는 화려한 치료보다는 꾸준한 ‘돌봄’이 필요하며, 무리한 확장보다는 내실과 효율(소프트웨어)이 생존을 결정합니다.
정부는 앞으로도 건보 재정 관리를 위해 각종 규제와 정책을 쏟아낼 것이고, 환자들은 경제적 이유로 보험이 적용되는 필수 의료만 소비하려 할 것입니다. 과거처럼 덩치를 키워 환자를 유치하던 시대는 지났습니다. 기존 치료 중심의 인프라가 남긴 빈틈, 그리고 국가가 다 채워주지 못하는 ‘돌봄의 공백’을 어떻게 메우고 효율화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이 앞으로 병원 경영자와 환자 모두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