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정책

의사과학자 정책의 시작: 주무부처 변경부터

상계동백곰 2025. 11. 12. 05:23

의사과학자(Physician-Scientist, MD-PhD)는 임상 현장의 질문을 실험실로 가져오고, 기초과학의 성과를 다시 환자에게 적용하는 '중개연구(Translational Research)'의 핵심입니다. 초고령화 사회 진입과 바이오헬스 산업의 중요성이 커지는 지금, 이들의 역할은 국가 경쟁력과 직결됩니다.

 

그러나 한국의 의사과학자 양성 정책은 실질적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지원 부족이 아닌, 정책을 주도하는 보건복지부의 '관점 오류'와 '구조적 자기모순'이라는 근본적인 한계 때문입니다. 혁신을 가속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정책 프레임을 '보건의료 통제'에서 '미래산업 육성'으로 완전히 전환해야 합니다.

 

혁신 촉진과 재정 통제의 자기모순 (보건복지부의 태생적 한계)

 

현재 의사과학자 양성 사업은 보건복지부(복지부)가 주도하고 있습니다. 이 구조는 설명하기 힘든 자기모순을 내포합니다. 복지부는 한편으로는 의사과학자를 육성해 신약 개발을 '촉진'해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건강보험 재정을 관리하며 신약의 약가를 '통제'하는 역할을 동시에 수행합니다.

 

이는 산업 육성 관점에서 볼 때 기형적입니다. 신약 개발에 성공해도 합당한 시장 가치를 보상받기 어려운 환경은 연구 동기를 근본적으로 저해합니다. 일반 산업 분야에서는 산업통상자원부나 과학기술정보통신부(과기부)가 성장을 촉진하고 환경부나 고용노동부, 공정거래위원회가 부작용을 통제하는 역할을 분담합니다. 그러나 유독 바이오헬스 분야만 '촉진'과 '통제'의 주체가 동일하여, 결국 통제의 논리가 혁신의 논리를 억누르고 있습니다.

 

'형평성' 논리에 갇힌 보상 부재 (기회비용의 외면)

 

복지부의 이러한 이중적 잣대는 의사과학자 양성의 핵심인 '보상 문제'에서 가장 명확히 드러납니다. 임상 진료의 고수익을 포기하고 불확실한 연구의 길을 선택하는 것은 막대한 '기회비용'을 감수하는 행위입니다. 하지만 복지부는 타 분야와의 '형평성'을 이유로 이들에 대한 합리적인 보상 책정에 소극적입니다.

 

이는 의사 면허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 타 연구 인력보다 훨씬 긴 수련 기간(의대 6년, 전공의 수련 등)과 포기해야 하는 임상 수익의 가치를 보전하는 '연구 몰입 환경 조성비'로 접근해야 합니다. 형평성 논리에 매몰되어 핵심 인력의 기회비용을 외면하는 것은, 국가의 미래 산업 동력을 스스로 깎아 먹는 일입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보상 체계 재정비가 필요합니다.

  1. '연구직 의사면허수당'의 법제화: 국공립 연구기관이나 대학병원 연구직 채용 시, 임상 수익과의 격차를 보전하는 수준의 수당을 책정하여 연구 전념 환경을 보장해야 합니다.
  2. 의무/전문박사 학위 경력 인정: 6년제 의학사 과정을 박사 학위에 준하는 경력으로 환산하여 호봉을 가산하는 등, 긴 수련 기간을 현실적으로 보상하여 형평성 논란을 최소화하고 실질적인 처우를 개선해야 합니다.
  3. 교원 창업 지분 규제 완화: 현재 교원 및 연구원 창업 시 소속 기관(산학협력단 등)이 15% 이상의 과도한 초기 지분을 가져가는 규제는 불확실성이 큰 바이오 스타트업의 현실과 맞지 않습니다. 위험을 감수하는 의사과학자에게 더 많은 초기 지분을 보장하여, 연구 성과가 성공적인 창업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강력한 동기를 부여해야 합니다.

 

근본적 해법, 주무부처 이관 (관점의 전환)

 

결국 앞에서 지적한 문제들의 근본적인 해법은 의사과학자 양성 정책의 관점을 '공공 보건'에서 '국가 산업 발전'으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주무부처 이관을 통해서만 강력한 동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과거 한국한의학연구원(한의연)의 사례는 이를 뒷받침합니다. 한의연은 복지부 산하에 있을 당시 예산과 연구 역량 확보에 한계를 겪었으나, 과기부 산하 정부출연연구원으로 이관된 후 예산 규모가 비약적으로 증가하며 연구기관으로서의 위상을 확립했습니다.

 

의사과학자의 본질이 '연구'에 있음을 고려할 때, 주무부처를 산업통상자원부 또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로 이관하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이는 정책의 무게중심을 '통제'에서 '육성'으로 옮기는 상징적인 조치입니다. 다만, 이관 후에도 의사과학자의 본질인 임상-연구 연계(Translational Research)가 원활히 작동하도록, 새 주무부처와 복지부 간의 데이터 및 임상 협력 체계는 더욱 강화되어야 합니다.

 

'복지'의 안경을 벗고 '산업'의 망원경을 쓸 때

 

가계부채와 인구절벽의 사례가 보여주듯, 한국 사회는 명백한 위기 신호 앞에서도 선제적 대응을 미루다 '골든타임'을 놓치는 악순환을 반복해왔습니다. 의사과학자 양성 문제 역시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이야말로 '보건복지'라는 낡은 안경을 벗고, '미래산업 육성'이라는 망원경으로 이 문제를 바라볼 때입니다. 미래 혁신 인력에 대한 과감한 투자와 보상을 실행할 정치적 결단이 시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