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정책

의정갈등, 그 후: 의협에 남은 단 하나의 카드

상계동백곰 2025. 11. 10. 20:33

의정갈등은 공식적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1년 8개월간의 '보건의료 위기 경보 심각 단계'가 해제되고, 정부는 비상 진료 체계를 거두며 '정상화'를 선언했습니다. 의대 정원은 1,500여 명 늘었다가 동결되었고, 떠났던 전공의들은 각자의 선택에 따라 일부 복귀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간 듯 보입니다.

 

하지만 이는 폭풍 전의 고요함일 뿐입니다. 비대면 진료, 성분명 처방, 한의사 엑스레이 사용, 공단 특사경 등, 과거 의사협회(이하 의협)가 파업이라는 막강한 카드로 국회 상임위 안건 상정조차 막아왔던 정책들이 이제 정부의 숙원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제도화를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전공의 파업이라는 '핵폭탄'을 썼음에도 정부가 의료전달체계 개편과 PA 간호사 합법화로 시스템을 우회하자, 의협의 협상력은 사실상 무력화되었습니다. 의협은 이제 국민, 정치권, 그리고 다른 의료단체들에게까지 사방이 포위된 '공공의 적'이 되었습니다.

 


1. 잃어버린 협상력과 무의미해진 투쟁

 

현재 의협이 고수하는 '투쟁 일변도'의 전략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습니다. 이미 가장 강력한 카드였던 전공의 사직과 의대생 휴학은 정부에게 '의료 시스템 개편'의 정당성만 부여하는 자충수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만약 전공의와 의대생들이 다시 한번 집단행동에 나선다 해도, 이는 의사 증원의 필요성을 역설적으로 증명해 주는 꼴이 될 뿐입니다.

 

사실 이제 의대 증원 자체는 핵심 이슈가 아닙니다. 정부는 의사들이 독점했던 권리(진료, 처방, 검사)를 PA간호사, 약사, 한의사 등 타 직역에 나누어 주는 방식으로 '증원과 같은 효과'를 이미 거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의협이 기존의 방식대로 투쟁을 외치는 것은, 이미 핵을 맞고 밀리고 있는 전장에서 재래식 무기만 고집하는 것과 같습니다.

 

2. '동귀어진(同歸於盡)', 타겟을 바꿔라

 

전쟁에서 승리가 불가능할 때, 패배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상대에게도 상응하는 타격을 입혀 전리품을 챙기지 못하게 하는 '상호확증파괴(MAD)' 전략이 있습니다. 의협에게는 이제 이 '동귀어진'의 카드 외에는 남은 것이 없어 보입니다. 이 전략은 감정적인 복수가 아니라, 상대(정부)가 '이대로 밀어붙이면 손해'라는 판단을 하게 만드는 유일한 협상 카드입니다.

 

그렇다면 그 대상은 누구여야 할까요? 바로 국민건강보험공단(이하 공단)입니다.

 

공단은 100조 원에 가까운 국민의 돈을 쥐고 있지만, 실상은 보건복지부의 '쌈짓돈'처럼 쓰인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인플레이션 시대에 국민들은 천정부지로 치솟는 건강보험료(이하 건보료)에 대한 부담과 불신이 커지고 있습니다. 피부양자 범위 축소, 방만한 경영 문제 등은 이미 공공연한 사실입니다. 의협은 그동안 청구 압박을 우려해 공단과의 마찰을 피해왔지만, 이제는 상황이 다릅니다. 공단이 보장하는 급여 진료는 이미 '하면 할수록 적자'가 되었고, 정부는 비급여 관리로 개원가를 압박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공단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이유가 사라진 것입니다.

 

3. 전선 축소와 '국민'을 아군으로 만드는 프레임 전환

 

공단을 목표로 삼는 순간, 의협은 가장 강력한 아군인 '국민'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는 '의사 vs (정부+국민)'이라는 최악의 구도를 ' (의사+국민) vs (공단+복지부)'라는 새로운 구도로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전략입니다.

 

의협은 스스로를 '공단 수가 정책의 피해자'로 규정하고, "공단의 방만한 경영과 잘못된 정책이 국민들의 건보료 부담만 키우고, 의사들은 적자 진료를 강요받고 있다"는 프레임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특히 소득 상한이 없는 건보료 부과 방식(특히 금융소득)을 공격하면, 노후 대책으로 금융 소득을 중시하는 고령층의 지지까지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전략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사방에 적을 둔 상태로는 공단이라는 거대 조직을 상대할 수 없습니다. 의협은 먼저 '전선'을 과감하게 축소해야 합니다. 불필요한 갈등을 정리하고 아군을 확보해야 합니다.

 

가장 상징적인 예가 바로 한의사들을 상대로 한 '한특위(한방대책특별위원회)'의 즉각적인 해체입니다. 의협은 그동안의 우월적 태도(내려보기)를 버리고, 다른 의료 단체들과의 소모적인 갈등을 중단해야 합니다. 한특위 해체와 같은 가시적인 '성의'를 보여줌으로써, 이들이 최소한 의협의 '적'이 아닌 '중립' 지대에 머무르게 만들어야 합니다.

 

다른 의료 단체들도 공단의 정책에 불만이 없는 것이 아니기에, 이 전선에서는 반대할 명분이 없습니다. 의협이 내려놓을 것을 과감히 내려놓고 전선을 좁힌 뒤, 모든 화력을 '공단'에 집중시켜 국민과 연대하는 것. 이것이 의정갈등에서 완패한 의협이 내줄 것은 다 내주고 빈손으로 쫓겨나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피할 유일한 길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