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병학 및 한의학

내재화로 완성하는 현대 한의학

상계동백곰 2025. 11. 5. 19:57

1. 멈춰버린 한의학, 다시 뛰기 위한 몸부림

 

최근 오랫만에 한의사들이 중심이 되는 기초한의학회를 다녀왔습니다. 국책연구원에서 일하면서 세계 각국의 학회를 다니던 것이 10여년 전이었습니다. 다시 학회를 가니 옛 생각도 나기도 하고, 요즘 한의사들과 한의대생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보고 들을 수 있어 의미가 깊은 자리였습니다.

 

학회 마지막에는 교수님들과 청중들이 한의학에 대한 논의를 펼쳤는데, 제가 20여년 전 학교에 입학했을 때, 10여년 전 연구를 할 때와 비슷한 고민들이 있는 것 같아 아쉬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마치 발전이 없이 그대로 멈춰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얘기를 들어보면, '한의학은 우리의 전통이고 민족의 유산'이라는, 실용학문의 대표인 의학에서 쓰이기 어려운 이유를 내세워 꺼져가는 불꽃을 지키려던 예전과는 분명 달라진 점이 보였습니다. 다행히 지금은 그러한 움직임보다는, 한의학 전공자들이 마주하는 현실을 파악하고 진단하면서 이를 바꿔보려는 움직임이 더 두드러졌습니다. 여전히 제가 학부생 때 나왔던 이야기와 개념들도 나오지만, 교수님들도 그렇고 학생들도 한층 진취적이고 발전적인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2. '통합'의 두려움을 넘어: 왜 '내재화'인가?

 

다만 아쉬운 것은 방향성보다는 표현에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양방생리학과 한방생리학을 합쳐야 한다'는 표현은, 수많은 사람들이 엄청난 자원을 들여 쌓아 올린 현대 생리학에 한방 생리학은 유물로 묻히고 없어질 것이라는 두려움을 야기합니다. 저는 이러한 두려움이 생리학 뿐만 아니라 약리학, 본초학, 병리학 등 여러 한의학 제반 분야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현상에다 중의학까지 의식하면 남는 것은 사상체질과 사암침법이라는 웃지 못할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저는 그래서 '합치거나 받아들여야 한다'는 표현보다는 '내재화(Internalization)'라는 단어를 썼으면 합니다.

 

분자생물학에는 '센트럴 도그마(Central Dogma)'가 있습니다. DNA-RNA-단백질의 전사과정을 기본 원리로 삼는 이 원칙은, 실제 현상에서 역전사나 RNA 복제 등 위배되는 현상이 보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현상을 설명할 수 있기에 절대적인 원칙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한의학에 센트럴 도그마가 있다면 저는 '전일성(Holism)'이라고 봅니다. 음양오행이나 기혈은 이를 설명하기 위한 도구로서 오랫동안 기능해왔을 뿐입니다. 천년이 넘는 한의학의 발전 역사는 한의학이 정체되거나 변화가 없는 학문이 아니라 치열한 토론과 반증, 임상 교류 속에서 수많은 패러다임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가장 대표적인 변화가 바로 '온병학'입니다. 상한론에서 개념만 제시되었던 온병이 18세기 이후 새로운 이론 체계를 구축하면서 양자강 이남에서 시작된 흐름이 만주족들이 중심인 청나라 황실의 처방 변화를 이끌 만큼 거대했습니다.

 

이처럼 중국 대륙에서 온병학이 태동할 때,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의 문화를 거부했던 조선은 온병의 수용, 즉 '내재화'를 포기했습니다. 동의보감 편찬 당시 세계적 수준이었던 조선의 의학은 이후 2백년 이상 동의보감의 반복으로 그쳤습니다. 내재화를 포기한 학문은 정체될 수밖에 없습니다.

 

3. '지금의 언어'로 재무장하고 사회적 역할을 회복할 때

 

선도그룹을 쫓아가고 모방하는 '캐치업 전략'이나 '하향식 혁신'은 한의학에 통하지 않습니다. 일본의 한약 제제 기술이나 중국의 기초이론 연구를 벤치마킹하는 것의 한계는 지난 20년간 명확히 드러났습니다.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한의학을 현대과학에 강제로 합친다고 합쳐지지도 않습니다. 한약 분쟁 이후 30여년의 역사가 이를 증명합니다. 이제는 지연되었던 한의학의 '내재화'를 시작해야 합니다. 이 내재화의 논의를 20년 전과 똑같이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다시 시작'해야 하는 이유는, 이제서야 이를 실행할 수 있는 기술적, 세대적, 제도적 토대가 마련되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연구하는 네트워크 약리학이나 다양한 분자생물학적 분석 도구들은, 한의학의 '전일성'이라는 센트럴 도그마를 '지금의 언어'로 표현하는 데 용이할 뿐만 아니라, 해당 학문들을 한의학의 범주 안에 품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학회에서 본 젊은 한의사와 학생들의 진취적인 태도는 이 변화를 이끌어갈 주체로서의 에너지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내재화' 선언은 내부의 두려움을 설득하는 동시에, 외부(현대의학계)로부터 '비과학의 편입 시도'라는 오해와 저항에 부딪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내재화는 '영역 다툼'이 아니라, 현대 과학의 내재화 과정을 통해 한의학이 국민 보건에 기여하는 '가치 창출'임을 명확히 해야 합니다.

 

내재화의 최종 목표는 학문적 성취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동의보감 시절 한의학이 전염병 관리, 출산 장려, 기근 및 재난 대비 등 공공영역에서 수행했던 '사회적 역할'을 회복하는 구체적인 경로가 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본초와 방제를 분자 생물학의 관점으로 '내재화'하는 것은 신약 개발을 넘어, 현대 사회의 만성 질환, 스트레스, 노령화 문제에 대한 예방의학적 해법을 공중보건의 언어로 제시하는 작업이 될 것입니다.

 

이미 하고 있는 것들이지만, '내재화'라는 관점에서는 한의학 전공자들이 주체가 되어 생명현상을 전일성의 관점에서 지금의 언어로 풀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재화 과정에서 수 많은 다른 분야의 과학자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도 한의학의 우군을 넓히는 방법입니다. 이제는 논의를 넘어, 많은 참여를 통한 실행이 필요한 시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