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정액제의 종말과 한의원의 변화
1. 모순의 시작: 20년 넘게 멈춘 '15,000원'의 굴레
노인외래정액제(이하 노인정액제)는 한의원을 운영하는 원장들에게는 익숙하지만, 대다수 사람에게는 생소한 개념입니다. 흔히 '어르신들은 2,000원이면 침 맞을 수 있다'는 것이 이 노인정액제를 적용받은 것으로, 신문 기사를 포함한 언론에서는 잘 모르기도 하고 별 관심도 없는 분야로 취급되어 왔습니다.
노인정액제는 1995년부터 노인들의 의료비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서 시작된 제도입니다. 입원이 아닌 외래 진료비 중 총 진료비가 15,000원 이하일 경우, 환자는 공단 청구 금액의 10% 수준인 1,500원(의원급 기준)만 본인부담금으로 내는 제도입니다. 이 제도가 복지 개념인 이유는, 노인이 아닌 일반 환자들은 청구하는 진료비의 30%를 환자가 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허리 통증으로 한의원에서 침을 맞으면 보통 진찰료, 침 시술 비용 등을 포함해 25,000원 정도가 총 진료비입니다. 대다수 환자는 30%인 7,500원을 본인부담금으로 병원에 결제하고 나머지는 병원이 국민건강보험공단에 청구해서 받습니다. 노인정액제는 25,000의 10%인 2,500원만 내는 것이고 그나마도 이 총 진료비를 15,000원에 맞춰 1,500원만 받도록 유도했습니다.
문제는 이 '15,000원'이라는 상한선이 2001년에 정해진 이후 20년 넘게 거의 그대로라는 점입니다. 물가와 의료 수가는 매년 올랐지만 기준은 제자리에 머물렀습니다. 당장 2024년 기준 의원급 초진 진찰료만 해도 17,000원이 넘어, 병원에 와서 진찰만 받아도 노인정액제 범위를 벗어납니다. 이로 인해 병원에서 치료를 더 하고도 청구액을 15,000원 상한에 맞추는 '축소 청구'가 비일비재했습니다. 정부는 청구한 진료비보다 적게 진료하면 득달같이 잡으러 오면서도, 환자에게 많이 해주고 적게 청구하는 것은 '복지'라는 이름으로 묵인했습니다.
2. '복지'라는 이름의 공생, 그리고 고금리 시대의 균열
이 모순적인 제도는 코로나 이전 저금리 시대까지는 그럭저럭 유지되었습니다. 몸이 불편한 노인들은 폐지 수거로 받은 돈이나 자식들이 준 용돈 같은 쌈짓돈으로 병원에 갈 수 있다는 만족감을 얻었습니다. 병원, 특히 한의원은 소위 '출근도장'을 찍는 환자들을 박리다매로 유치하는 전략을 썼습니다. 환자들을 유치하기 위해 돈도 받지 못하는 각종 물리치료는 물론, 의자형 안마기, 다리 마사지기 등 '의료기기 체험장'을 방불케 할 만큼 서비스를 제공했습니다. 정부 역시 이를 '복지'라는 이름으로 묵인했습니다. 모두가 괜찮다고 봤던 '이상한 공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 이후 고금리 시대가 되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인플레이션이 부활했고 사람들은 지갑을 닫기 시작했습니다. 세수 부족이 일상이 되었고, 사람들은 그전까지 그럭저럭 내던 건강보험료가 부담스러워졌습니다. 설상가상으로, 팬데믹 이후 변화된 노동 시장과 인구 구조의 변화로 외국인 노동자를 포함한 노동 공급이 예전같지 않게 되었습니다. 인건비가 급등했고, 이는 최저임금으로 돌아가는 대다수 동네 병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최저임금으로 코로나 이전에는 20~30대 직원을 썼다면 지금은 40~60대 직원을 써야 해, 손이 많이 가고 복잡한 진료가 어려워졌습니다.
노인정액제는 여기서 직격타를 맞습니다. 노인 환자들은 젊은 환자들에 비해 손이 많이 갑니다. 아픈 곳도 많고, 한번 거동이 힘드니 온 김에 많은 치료를 받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당장 1,500원의 치료비가 아쉬우니 발길을 끊기 시작합니다. 병원 입장에서는 노인정액제로 받는 돈(15,000원에 대한 공단 부담금)은 똑같은데, 손이 많이 가는 노인 환자를 보자니 인건비 상승으로 인해 비용이 급증하는 구조가 됩니다. 환자가 몰려도 치료를 하면 할수록 손해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3. 종말의 서곡: '양'에서 '질'로의 강제된 전환
정부 역시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당장 요양과 간병비만으로도 건강보험 예산 적자를 걱정해야 할 지경입니다. '복지부동'으로 유명하던 보건복지부가 의정 갈등 이후 각종 제도 개편에 나선 이면에는, 자신들의 '쌈짓돈'처럼 여겨지던 건강보험 적립금이 소진되는 순간 부처의 위상이 기획재정부에 종속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있습니다. 농담처럼 거론되던 '기획재정복지부' 혹은 '기재부 산하 보건국'으로의 격하가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막기 위한 핵심 전략은 결국 건강보험 지출 구조를 재편하는 것입니다. 예산을 중증 질환, 간병, 요양 등 필수 분야에 집중하는 대신, 다른 정책의 축소나 폐기가 수반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거대한 흐름 속에서, 그동안 '복지'라는 이름으로 묵인되어 온 노인정액제는 자연스럽게 정책적 우선순위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습니다.
노인정액제가 없어진 세상은 어떨까요? 일단 노인들이 '출근도장'을 찍듯이 운영되던 병원 모델이 사라질 것입니다. 경제적 여유가 없는 노인들은 통증을 참다가 거동이 어려워지는 단계에 이르러서야 요양 서비스를 찾게 될 가능성이 높고, 반면 여유가 있는 노인들은 평소에 한의원에서 약도 먹고 침도 맞으면서 몸 관리를 할 것입니다.
병원의 '실력'이 중요해질 것입니다. 이전 모델은 정해진 금액에 '얼마나 많은' 서비스를 해줄 수 있는지가 관건이었습니다. 의료 서비스의 질(Quality)보다 양(Quantity)이 우선되던 모델이었습니다. 하지만 비용이 비싸지고 이를 자기 돈으로 내기 시작하면, 양보다 얼마나 자신에게 문제가 되는 질환을 '잘', '빨리' 해결해주는지가 관건이 됩니다.
한의원은 넓은 공간에 많은 직원과 물리치료 기기를 쓰던 모델의 종말을 맞을 것입니다. 노인이라고 일반 환자와 다를 바 없이 치료하고 돈을 받을 것입니다. 1,500원으로 침 맞던 시대는 끝나고, 최소 8천 원에서 3~4만 원도 드물지 않은 시대가 오는 것입니다.
노인정액제는 아이러니하게도 정부의 능동적인 대처가 아닌, '고금리'라는 경제 환경의 변화 속에서 그 종말을 맞이할 것으로 보입니다. 진작에 물가와 수가 인상을 반영해 정액제 기준을 현실화하거나, 본인부담률을 점진적으로 조정하는 '연착륙'을 유도할 주체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모순된 제도를 놓고 이해관계가 다른 집단이 이토록 달라진 인식을 보이면서, 과연 제도의 흐름을 끌고 가는 주체가 있긴 한지 아쉬운 쓴맛을 남깁니다.